역전다방46 ☆태평양전쟁 ep.45 결정의 순간! 일본 몰락작전 vs 원자폭탄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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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일 2022. 06. 14.
  • #히틀러 의 자살에 이어 #독일 이 #항복 하자
    #일본 내부에서는 빠른 #전쟁종결 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반면, #미군 은 #유럽전선 의 병력을 #태평양전선 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데...
    일본 열도 상륙작전으로 #몰락작전 을 계획하는 #미국
    그러나 사상자 예상 규모가 커지자 #원자폭탄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는데...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된 일본의 도시는 어디이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역전다방 4인의 시선을 통해 확인해본다.
  • 엔터테인먼트

댓글 • 277

  • @llu5327
    @llu5327 년 전 +18

    아니 이걸 여기서 끊으면 어떻게해

  • @tracer6886
    @tracer6886 년 전 +12

    아니 어떤 방송에서 코트니 호지스와 로턴 콜린스를 다뤄주겠어 ㅋㅋㅋ 이 방송은 전설이다

  • @dr119262
    @dr119262 년 전 +72

    진짜 몇 편 더하면 1년이다. ㅋㅋ 이건 역사학자수준으로 상세하게 볼수있어서 너무 좋음.ㅎㅎ

  • @usergwhsj1
    @usergwhsj1 년 전 +11

    14:15 저 시절에도 미국은 아빠들을 존중해줬구나..

  • @user-zo4sd3kt6i
    @user-zo4sd3kt6i 년 전 +30

    이런걸 유튜브로 무료 시청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ㅜㅠ 너무 좋아요

  • @LEEKANGCHAN
    @LEEKANGCHAN 년 전 +8

    와! 진짜 무슨 연속극보는 것 같네~^*^
    극적인 부분에서 끊어 버리네 ~^^

  • @user-tv4ey9qq8r
    @user-tv4ey9qq8r 년 전 +76

    다음주 원폭설명 엄청 기대된당 ㅋㅋㅋ

    • @tonykim5285
      @tonykim5285 년 전 +11

      집에서 만들어볼 생각에 싱글벙글!

    • @scz8333
      @scz8333 년 전 +2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user-sk3ef2ny3l
    @user-sk3ef2ny3l 년 전 +4

    으아아아아악!!! 여기서 끊으시면 어떻게 하라고요!!!

  • @ipsy7312
    @ipsy7312 년 전 +7

    빨리 틀어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 @yschae7169
    @yschae7169 년 전 +14

    정주행 완료!! 수요일만 기다렸습니다

  • @swordofgod1977
    @swordofgod1977 년 전 +8

    다음주 수요일이 너무너무 기다려집니다. 빨리와라 다음주 수요일이여~

  • @andyson1004
    @andyson1004 년 전 +13

    어릴적 막연하게 왜 도쿄 천황머리에 원자탄 안떨어트렸지를 여기서 이렇게 자세한 내막까지 알아버리네요.. 갓프로그램입니다

  • @user-ok4nx7ip9l
    @user-ok4nx7ip9l 년 전 +6

    시간순삭이네요 다음주도 기대됩니다~

  • @uchpracachia5414
    @uchpracachia5414 년 전 +6

    와 재밌다 안봤는데 벌써

  • @fithwang4021
    @fithwang4021 년 전 +19

    진짜 존잼이다.. 계속 빠져듭니다 롱런해주세요!

  • @kangsj1977
    @kangsj1977 년 전 +8

    언제나 선추천 후감상!! 최고입니다!!

  • @mmanhb552
    @mmanhb552 년 전 +29

    몰락작전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까지 살뜰하게 짚어줘서 넘 좋다 덕분에 채박사님의 밀싸타임은
    담주에..

  • @user-ou2lx8qq3v
    @user-ou2lx8qq3v 년 전 +40

    채승병교수님... 진짜 승인만 나면 원자폭탄 집에서 만들수 있을지도 몰라....
    항상 다음편이 더 기대되 역전다방!!!

    • @MrSeriousfighter
      @MrSeriousfighter 년 전 +5

      이미 갖고 있을지도

    • @scz8333
      @scz8333 년 전 +1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user-ou2lx8qq3v
      @user-ou2lx8qq3v 년 전 +13

      @@MrSeriousfighter 채승병 교수님 : 이게 바로 그 원자 폭탄입니다. 1945년과는 크기는 다르지만 원리는 같은데요. 여기 신관 보이시죠. 이걸 이렇게 누르면..이제 활성화 됩니다.그리고.. 15천 피트의 고고도에서 떨어트리게 되면 세팅값이 1분정도 되는데요... 이렇게 누르면 3분정도로 지연됩니다. 이렇게 작아도 여기서 반경 5km가 살상 범위죠.
      그외 나머지 : ㄷㄷㄷ

    • @user-ou2lx8qq3v
      @user-ou2lx8qq3v 년 전

      @@scz8333 감사합니다~. 좋은정보 얻고 가네요~

    • @namchangp.1721
      @namchangp.1721 년 전

      @@user-ou2lx8qq3v 어... 어??

  • @user-jl1yg7jt3z
    @user-jl1yg7jt3z 년 전 +2

    매화 항상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maatpon
    @maatpon 년 전 +13

    시간가는줄 모르고 보다가 정신차려보니 새벽 3시 반이네;;
    역전다방은 어떤 영화보다도 재밌고 어떤 드라마보다도 몰입된다

  • @PINQUBE
    @PINQUBE 년 전 +3

    전쟁이 한창일 때는 전장 위주로 시선이 모이지만 막바지에 이르니 정치외교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이야기가 나오네요
    마무리를 잘짓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답을 이끌어내는 과정과 그들을 대표하는 우리 역전다방의 패널들..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 @sadislandtired9965

    다음주 완전기대합니다~!

  • @user-ms5hb2uh7q
    @user-ms5hb2uh7q 년 전 +3

    매번 감사합니다.난 주말보다 수요일이 기다려진다

  • @user-qv4md7nb4c
    @user-qv4md7nb4c 년 전 +2

    6.25전쟁도 이렇게 해줬으면

  • @user-qy5xb7qg3v
    @user-qy5xb7qg3v 년 전 +3

    완적 역대급~ 이래서 역전다방 외면 할 수가 없다니깐!

  • @user-rs1cf2db2d
    @user-rs1cf2db2d 년 전 +5

    가즈아아아아아아~~~~~~~~

  • @S_TRA
    @S_TRA 년 전 +9

    진짜 미국은 전설이다,,,,, 저 많은 물량이 동원이 가능하다는게,,,

  • @TV-pu5ph
    @TV-pu5ph 년 전 +8

    청일전쟁 러일전쟁도 다뤄주시길 바랍니다 ^^

  • @kimsids
    @kimsids 년 전 +3

    역시 디테일이다른..!!

  • @user-iv2tj1dw7r
    @user-iv2tj1dw7r 년 전 +12

    와! 이번 편은 역대급으로 너무 재밌네요^^

  • @ssaregi1
    @ssaregi1 년 전 +4

    가장 기다려지는 채널. 항상 감사합니다.

  • @kingmaker0101
    @kingmaker0101 년 전 +3

    한수를 넘어 두수 세수를 미리 보는 마샬원수...역시 별5개 달만 하네요

  • @intruder2627
    @intruder2627 년 전 +2

    진짜 태평양 전쟁으로 1년ㄷㄷ 유럽전선과 이후 냉전기 전쟁까지 기대됩니다

  • @user-fo3uv1qg7d
    @user-fo3uv1qg7d 년 전 +6

    빨리 보고 싶네요..^^

  • @user-hu6bd3oe8l
    @user-hu6bd3oe8l 년 전 +6

    소련도 몰락작전 같은걸 작전세웠는데 그것도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turna2980
    @turna2980 년 전 +3

    뉴클리어 그 이후에 이야기, 전범재판까지
    정말 너무 기대되며 마지막이 다가온다는게 한편으론 아쉽고

  • @user-li1uw4bz7c
    @user-li1uw4bz7c 년 전 +5

    14:40 미혼은 어딜가나 죽어야 하는 겁니까~ ㅎㅎㅎㅎ 1인가구 너무 서럽네!!

  • @XXfrex
    @XXfrex 7 개월 전 +1

    오펜하이머 보는데 진짜 역전다방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 @arthurwoo5145
    @arthurwoo5145 년 전 +5

    역시 역전다방!!!

  • @jinhookim1938
    @jinhookim1938 년 전 +1

    어우~~ 다음주까지 어떻게 기다려!!

  • @user-xy2jk8wq2v
    @user-xy2jk8wq2v 년 전 +3

    채박사님 ㅋㅋㅋㅋㅋ
    인정

  • @Beentomoon
    @Beentomoon 년 전 +2

    오이오이 오래기다렸다구우 ~

  • @user-sy4cn5gr2l
    @user-sy4cn5gr2l 년 전 +2

    좋은강의 너무 잘 보고있어요
    감사합니다

  • @vinniekim6899
    @vinniekim6899 년 전 +13

    참...그리고 걱정인건...
    올해 심소령님 진급할테고...대대장은 무조건 나가셔야 할텐데...ㅜㅜ
    이게 참 어렵네요.
    당연히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진급은 하셔야하는게 백번 맞는건데...
    역전다방을 위해서는...ㅜ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ㅜㅜ
    진때까지는 꼭 해주시길 바라옵고, 대대장 무탈하게 마치고 또 돌아오셔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 @user-hi9dw8sh8b
      @user-hi9dw8sh8b 년 전 +1

      심소령님은 교수사관이시라서 아마 쭉 나오실수 있으실꺼 같아여

  • @shawnpark3354
    @shawnpark3354 년 전 +4

    일주일이 길지 않다 !!! 이 수요일 오후 6:00시 때문에…

  • @user-kc2sb6hm2d
    @user-kc2sb6hm2d 년 전 +4

    수송선 없어서 항공모함 갑판에 새까맣게 탑승한거 빵 터졌네 ㅋㅋㅋㅋ

    • @scz8333
      @scz8333 년 전

      ww2 the queen mery, the grey ghost : krplus.net/bidio/fdenm3ugoIzXnH4
      2차대전 중 퀸 메리 단독으로 퍼나른 인원은 81만명 이상, 항해 거리는 70만 해리로 지구 약 30 바퀴.
      ( 인류 역사상 단일 함정이 운송한 최대 인원 기록으로 아마도 영원히 깨지기 어려운, 퀸 엘리자벳도 비숫한 기록. )
      유럽 파병된 미군 중 운 좋은 이들은 당시 세계 최대 배수량 8만톤급,
      초호화 여객선 퀸메리-퀸엘리자벳 타고 귀환했습니다. krplus.net/bidio/ZrBriWVik428gqg
      300만 미 지상군 대서양 건너 유럽으로 퍼 나르기 위해 내부 호화 설비 다 제거하고, 호위함 없이 단독 항해.
      어지간한 호위함은 속도에서 쳐졌기 때문에 단독 고속 항해, 유보트들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30노트 이상 속도.
      만일 미군 유럽으로 퍼 나르다 유보트에 격침되었다면 1번에 만명 단위의 미군들이 희생되었을 겁니다.
      프랑스의 초호화 여객선 노르망디 역시 저 임무에 동원되기 위해, 미국 항구에서 내부 설비 공사 중 화재로 소실.

  • @Kunpo123
    @Kunpo123 년 전 +3

    다음 채박사님 밀사쿨 매우 기대됩니다ㅎ

    • @scz8333
      @scz8333 년 전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원자핵 변환을 통해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B-29 원폭 투하 임무 하마터면 랭커스터에게 빼았길뻔.
      b-29 아닌 랭커스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훈련 : b-29 폭탄창 개조 혼선으로, 영공군 특임 부대 역시 원폭 투하 훈련.
      krplus.net/bidio/ZbyQa6CmdYXUmpw : Hiroshima 1945 - The British Atomic Attack
      B-29의 폭탄창은 2개로 커다란 원폭 수용 불가, 대형 폭탄창 1개로 개조 어려움 겪으며,
      만약을 위해 영국공군 랭커스터 폭격기 특수 임무 부대 차출해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훈련도 함께 병행.
      랭커스터는 B-29 보다 짧았던 항속거리 때문에 공중급유를 받으면서 원폭 투하 훈련을 했다고, 이미 43년 부터 수 백기의
      랭커스터가 공중급유기로 전환되었고, 랭커스터 폭격기에 대한 실제 공중 급유도 44년에 프루브 방식으로 성공.
      댐버스터 폭격대 이끌었던 가이 깁슨, 1944년 9월 모스키토 폭격기 임무 수행중 독 전투기와 교전 충돌 전사.
      krplus.net/bidio/ndxwp4Kpc4XKiIY : Dambusters - Guy Gibson Grave & Crash Site
      깁슨이 추락한 네덜란드 마을엔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그의 묘소가 있습니다.
      동영상의 댓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댐버스터 작전 성공 후 임무 해제되어 공군을 떠난 뒤 , 미국 방문했을 때 독일 상공으로의 작전 횟수
      얼마나 되냐는 질문. 깁슨의 답변은 174회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부여된 의무로서의 작전 횟수를 몇 배 이상 초과했죠. (기억으로 미 폭격기 승무원들 30회 정도 임무 수행하면 귀국.)
      의무 복무 채운 상태에서 깁슨은 44년 다시 공군에 복귀. 모스키토 폭격기로 임무 수행중 독일 전투기와 교전하게 되었고, 충돌로 전사.
      당시 나이는 26세 중령 추서.
      (관련 댓글
      beefabob
      1년 전
      On 4 October 1943 Gibson began a tour of The United States and whilst in Washington DC., he attended a major Press Conference at the offices of the British Information Service in New York on 7 October. This was at a time when the first American airmen were coming home 'tour expired' after 25 operations. During questions one young lady asked, 'Wing Commander Gibson, how many operations have you been on over Germany?' He replied, 'One hundred and seventy-four.' There was a stunned silence" A truly great man.
      )
      영국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2차대전 중 약 36만5천회 출격, 약 100만톤 폭탄 투하, 폭격기 손실 약 8500대.
      투입 병력 약 12만5천 중, 전사 약 5만5천, 약 8천5백 부상, 약 1만명 포로 : 승무원 사망율은 약 45%에 달할 정도로 극도로 위험했습니다.
      독일의 폭격 피해 역시 막대해서, 폭격으로 사망 약 60만,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독일의 방공포 병력 약 90만이었다고 합니다.
      독일 입장에서 2차대전 독일을 폭격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미국의 b-17이나 b-29가 아닌 랭커스터 폭격기.
      b-29는 종전 직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기에 독일 폭격엔 사용되지 않았고, 거대한 b-17의 폭장량은 모스키토 폭격기와 비슷.
      랭카스터는 44년 이후엔 1발에 5톤, 10톤 하는 톨보이와 그랜드슬램으로 독일에 강력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랜드슬램은 너무 무거워
      투하하는 순간 랭커스터 폭격기 고도가 갑자기 위로 상승할 정도.
      랭커스터는 하마터면 히로시마 원폭을 투하할 뻔 했습니다.
      랭커스터의 폭탄창은 원폭을 별 다른 개조 없이 수용할 수 있었지만, 개발중이었던 b-29는
      폭탄창이 작아 원폭 탑재를 위한 개조 추가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려, 미국과 영국은 개발 실패를 대비,
      영국 폭격기 사령부내 특수 임무 부대를 차출해 승무원들에게 임무를 밝히지 않고 (일본에 대한 초장거리) 폭격 훈련에 돌입.
      b-29 보다 일찍 나온 기종이라 고고도 성능과 항속거리에게 부족했던 랭커스터는 원폭 투하를 위해,
      공중급유를 포함한 훈련을 거쳤습니다. 이미 45년 당시에 대형 4발 폭격기가 공중급유를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군요.
      원폭을 탑재한 타이거 편대 출격은 동남아의 영국 공군기지 또는 태평양의 미군 기지였는데 랭커스터 항속거리 초과로 공중 급유 필수.
      원폭 투하 랭커스터 편대 이름은 타이거였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다행히도, 원폭 수용할 수 있는 개조가 성공해 타이거 편대는 임무 해제.
      (미국이 보유한 b-17, b-24 등은 폭탄창이 작아 원폭 탑재 불가능. 새로 개발중인 b-29는 1개의 대형 폭탄창이 아닌, 2개의 폭탄창 구조라 원폭
      탑재 불가능, 기체 골격 자체를 변경해 폭탄창을 1개로 재설계해야 했는데 테스트 과정에서 몇 차례 실패했다고 하는군요. 히로시마 작전 투입
      직전에 폭탄창 개조가 완료. 영 랭커스터 폭격기는 폭탄창은 넉넉했지만, 항속거리 문제로 공중급유가 필요했는데 이미 1943년 이후 수백대의
      랭커스터기들이 급유기로 개조되었고, 실제 랭커스터 폭격기에 대한 공중급유도 44년에 프루브 방식으로 성공했다는 내용 포함.)

  • @user-qr2ls1cw4q
    @user-qr2ls1cw4q 년 전 +3

    진짜 재미있는건 담주거네ᆢ
    ㅋㅋ

  • @leessam07
    @leessam07 년 전 +7

    역전다방은 전설이다.

  • @user-oh8lp3on9n
    @user-oh8lp3on9n 년 전 +1

    기대중

  • @Driden3
    @Driden3 년 전 +7

    다음주 채박사님이 시작해서 채박사님이 끝낼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진짜 기대됩니다!

  • @HhH-gk8gi
    @HhH-gk8gi 년 전 +5

    정말재밌고 팬이긴한데 인류역사의 수많은 다른 전쟁도 보고싶습니다. 이미 컨텐츠 많은 2차대전 말고 고대, 중세,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등 다양한 전쟁들도 소개시켜주세요

  • @user-wp8rd2yd1g
    @user-wp8rd2yd1g 년 전 +1

    최근에 와서 봤는데 거의 1년 강의네요

  • @user-mv5mj9sw9t

    나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분들과 비교하니
    컽치례만 알고 있었네요!!

  • @user-gj2vn4ik8c

    넌 알거 없어라고 말하진 않았겠죠. 그런 뉘앙스였겠죠.

  • @user-xm9mp1fx6k
    @user-xm9mp1fx6k 년 전 +3

    아 멀미나요. 90분이라니...

  • @joywindy
    @joywindy 년 전 +4

    여기서 눕습니다...다음주 수요일에 깨워주세요^^;

  • @user-wz7kl3qq3m
    @user-wz7kl3qq3m 년 전 +2

    다음주는 물리시간인가요??

  • @user-cs9ve1bc4x
    @user-cs9ve1bc4x 년 전 +7

    교토는 일본에서 보수적일적같지만 제일 진보적인 도시임...학생운동의 거점이기도하고 생각보다 제대로된 역사교육을하는 도시임

    • @stefkim6000
      @stefkim6000 년 전 +3

      일본 좌파(우리 나라의 쓰레기 가짜 좌파와는 다릅니다) 의 본거지이고 일본의 여러 대기업, 전자 기업들의 본사가 京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1가구당 커피 소비가 가장 많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천년고도가 커피 소비량 1위 도시라는 게 정말 이채롭습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stefkim6000
      일본 좌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군요.
      대한민국과 달리 한 때 적군파 테러 조직이 활개치며 여객기 납치도 했던 세력.
      님이 언급한 일본 좌파와 교토 언급 부분 -----------> 좌파 본거지 교토 + 여러 대기업 본사 위치한 교토 + 커피 소비량 1위?
      ----------------------------------> 전형적인 한국 우아 고상한 강남-룸싸롱 좌파의 향기가 풍기는 듯.
      ----------------------------------> 저런 유형 좌파들은 자본주의의 혜택을 온 몸으로 누리며, 자본주의의 병폐를
      ----------------------------------> 자신들이 솔선 앞장 서서 영혼의 고뇌를 통해 치유하면서 자본주의에 흠뻑 젖어들고 있을 것.
      ------------------> 미안한 마음 가지면서 자본주의 누리는 저들이, 뻔뻔하게 고개 쳐든 자본주의 전사들과 다를 것 있겠습니까?
      쓰레기는 좌우가 없습니다. 좌만 아니라 우도 어마무시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stefkim6000
      이름이 뭐건 쓰레기는 쓰레기일 겁니다.
      한국전쟁에서 북괴와 중공만 쓰레기 짓 한 것 아닌 대한민국 우파의 쓰레기 짓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히틀러나치독일-스탈린소련-모택동중공-김일성북괴-유신두환독재 ... 좌건 우건 본질적으로 동일한 쓰레기로 표현만 다른.
      잠시 샛길로 들어서면,
      교토에 일본 전자기업들 본사가 있다고 소개한 부분.
      히다치 본사가 교토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히다치 日立 ------------------> 해일 + 설립
      히다치는 일립의 일본어 소리 읽기 음독 아닌 뜻 읽기 훈독으로, 놀랍게도 우리 말로 옮겨집니다. 이렇게 --------> 해돋이.
      일본의 조간신문 아사히 신문, 아사 + 히 = 아침朝 + 해日 ----------------> 이 역시 훈독으로 우리 말로 옮기면 --------> 아침해.
      거슬러 오르고 오르고 올라가면 과거 한일은 분명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샛길 끝.
      ( 천년고도가 커피 소비량 1위 도시라는 게 정말 이채롭습니다. )
      -----------------------------------> 어쩌면 교토는 엄청난 관광객이 찾기에, 현지 주민들 아닌 관광객의 커피 소비 때문일 수도.
      일본 좌파의 우아함과 교토의 전통 + 현대적 이미지를,
      대한민국 쓰레기 좌파와 연계 대비시키는 점잖은 지적은 대한민국 쓰레기 우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겁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2.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보도연맹-국민방위군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수호자, 보수 우파가 저랬다는 것도 잊어선 안되는.

  • @user-wj3ud7lv5n
    @user-wj3ud7lv5n 년 전 +7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고들 하는 텐놈까지 나서서 항복에 반대했다니... 텐노 덕에 핵 더 안 맞고 무사항복해서 남은 황국신민들을 살린 게 아니라 안 맞아도 될 핵폭탄을 텐노 때문에 얻어맞아 황국신민들 목숨만 괜히 더 죽게 한 뒤에야 항복당한 거군요.

    • @user-ov4oz8pz7t
      @user-ov4oz8pz7t 년 전 +1

      뭐그렇지요

    • @IJARI_GOGUMA
      @IJARI_GOGUMA 년 전 +3

      오 텐놈 좋은데?
      되도 안되는 일왕보다 히로히토 텐놈이 더 입에 착착 붙네 ㅋㅋ

  • @jinseokkim2877
    @jinseokkim2877 년 전 +3

    일주일에 46분은 너무 짧아요ㅠㅠ

  • @ziraltan
    @ziraltan 년 전 +1

    교토 정말 고즈넉 하니 좋은 도시 입니다
    우리로 치면 경주+대구 랄까?
    겁나 더워요

  • @user-px2nt6ri1o
    @user-px2nt6ri1o 년 전 +1

    이거 아주 중요한 영상이네요. 하세가와 등 미국이 소련참전을 저지하기위해 원폭을 투하했다는 수정주의가 득세하는 시대인데...

  • @hlee3584
    @hlee3584 개월 전

    07:15 로턴 콜린스 크👍

  • @zacharypark4268
    @zacharypark4268 년 전 +10

    너무 재밌어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지려버렸습니다..
    다음주 원자폭탄 개발할때는 역대 최고 조회수 찍겠네요.
    미리 지릴 준비하고 기저귀 차고 시청할게요 ㅋㅋ

  • @user-xi7et7hs1s
    @user-xi7et7hs1s 년 전 +10

    전쟁사의 뼈대를 설명하는 채승병교수님을 보고 와~~이분 정말 섭외 잘햇다고 생각을 해왔음, 요즘 전쟁사나 범죄사, 사건사고사를 설명하는 유튜브나 공중파가 유행인데 대부분이 구글링이나 나무위키수준의 내용을 부풀려서 설명하는 형식인데 채박사님은 전쟁사를 깊이있게 연구하신 티가 방송을 통해서 드러나는거 같다, 태평양전쟁사가 끝난다면은 사실상 제2차세계대전의 클라이막스였던 " 독소전쟁 " 근대전쟁중에 가장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긴 "베트남전쟁" 그리고 토크멘터리전쟁사에서 하다가 중단이된 "나폴레옹전쟁사" 이3가지중에 하나는 채박사님의 깊이있는 설명으로 좀 들어보고싶다. 다른채널에서 다루지 않았던 전쟁의 새로운 모습을 만날수있을거같다.

    • @dubu999
      @dubu999 년 전 +2

      채박사님은 2000년대 부터 밀덕들한텐 진짜 유명하신 분이었고 사실 이렇게 유튜브로 본다는게 신기하기 까지 합니다. 태평양전쟁으로도 이렇게 볼륨이 높은데 이분 주 전공이 유럽전선과 독소전쟁이라 더 기대가 되네요

    • @user-xi7et7hs1s
      @user-xi7et7hs1s 년 전 +2

      @@dubu999 네..동감입니다, 초기에는 방송에 아직은 적응이 덜 되신거 같아보이셨는데 요즘에는 아주 완전 적응하신거 같더라구요..독소전쟁 개전부터 마지막 소련의 승리까지 채박사님 방송 보고싶네요..^^

    • @scz8333
      @scz8333 년 전

      전쟁을 고래에 비유한다면, 채박사님이 고래를 해체해 그 뼈대를 보여줬다고 보긴 힘들군요.
      채박사님이 이끌었고 많은 성원을 받았던 회차 영상, 주로 해체된 특정 부위에 대한 전에 보지 못했던 상세한 설명이었습니다.
      근접신관-자이로스코프-노든조준기-전함-협차사격-대포병사격 ... ...
      전쟁 전체의 흐름을 뼈대라고 한다면 뼈대에 가장 적합한 패널은 박교수님으로 느껴집니다.
      독소전- 베트남전- 나폴레옹전 관련, 채박사님이 독소전에선 대활약 예상.
      하지만 베트남전-나폴레옹전은 2차대전과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나폴레옹전, 프랑스 대혁명을 무력 진압해서라도
      기존 왕정 체제를 유지코자 한 주변 대륙 강대국들과, 공화정으로 거듭나 명분 까지 갖춘
      강력한 세계패권 경쟁자 프랑스를 원치 않았던 영국의 무력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과학기술 부분 특화되기 어려운.
      베트남전 또한 2차대전 이후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식민지 해방과 뒤섞인 전쟁이라는 점에서 무기 체계나 과학기술은
      본질이 아니기에 토전사의 임교수님이나 역전다방 박교수님이 뼈대를 밝히기 더 적합해 보입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1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원자핵 변환을 통해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B-29 원폭 투하 임무 하마터면 랭커스터에게 빼았길뻔.
      b-29 아닌 랭커스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훈련 : b-29 폭탄창 개조 혼선으로, 영공군 특임 부대 역시 원폭 투하 훈련.
      krplus.net/bidio/ZbyQa6CmdYXUmpw : Hiroshima 1945 - The British Atomic Attack
      B-29의 폭탄창은 2개로 커다란 원폭 수용 불가, 대형 폭탄창 1개로 개조 어려움 겪으며,
      만약을 위해 영국공군 랭커스터 폭격기 특수 임무 부대 차출해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훈련도 함께 병행.
      랭커스터는 B-29 보다 짧았던 항속거리 때문에 공중급유를 받으면서 원폭 투하 훈련을 했다고, 이미 43년 부터 수 백기의
      랭커스터가 공중급유기로 전환되었고, 랭커스터 폭격기에 대한 실제 공중 급유도 44년에 프루브 방식으로 성공.
      댐버스터 폭격대 이끌었던 가이 깁슨, 1944년 9월 모스키토 폭격기 임무 수행중 독 전투기와 교전 충돌 전사.
      krplus.net/bidio/ndxwp4Kpc4XKiIY : Dambusters - Guy Gibson Grave & Crash Site
      깁슨이 추락한 네덜란드 마을엔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그의 묘소가 있습니다.
      동영상의 댓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댐버스터 작전 성공 후 임무 해제되어 공군을 떠난 뒤 , 미국 방문했을 때 독일 상공으로의 작전 횟수
      얼마나 되냐는 질문. 깁슨의 답변은 174회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부여된 의무로서의 작전 횟수를 몇 배 이상 초과했죠. (기억으로 미 폭격기 승무원들 30회 정도 임무 수행하면 귀국.)
      의무 복무 채운 상태에서 깁슨은 44년 다시 공군에 복귀. 모스키토 폭격기로 임무 수행중 독일 전투기와 교전하게 되었고, 충돌로 전사.
      당시 나이는 26세 중령 추서.
      (관련 댓글
      beefabob
      1년 전
      On 4 October 1943 Gibson began a tour of The United States and whilst in Washington DC., he attended a major Press Conference at the offices of the British Information Service in New York on 7 October. This was at a time when the first American airmen were coming home 'tour expired' after 25 operations. During questions one young lady asked, 'Wing Commander Gibson, how many operations have you been on over Germany?' He replied, 'One hundred and seventy-four.' There was a stunned silence" A truly great man.
      )
      영국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2차대전 중 약 36만5천회 출격, 약 100만톤 폭탄 투하, 폭격기 손실 약 8500대.
      투입 병력 약 12만5천 중, 전사 약 5만5천, 약 8천5백 부상, 약 1만명 포로 : 승무원 사망율은 약 45%에 달할 정도로 극도로 위험했습니다.
      독일의 폭격 피해 역시 막대해서, 폭격으로 사망 약 60만,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독일의 방공포 병력 약 90만이었다고 합니다.
      독일 입장에서 2차대전 독일을 폭격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미국의 b-17이나 b-29가 아닌 랭커스터 폭격기.
      b-29는 종전 직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기에 독일 폭격엔 사용되지 않았고, 거대한 b-17의 폭장량은 모스키토 폭격기와 비슷.
      랭카스터는 44년 이후엔 1발에 5톤, 10톤 하는 톨보이와 그랜드슬램으로 독일에 강력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랜드슬램은 너무 무거워
      투하하는 순간 랭커스터 폭격기 고도가 갑자기 위로 상승할 정도.
      랭커스터는 하마터면 히로시마 원폭을 투하할 뻔 했습니다.
      랭커스터의 폭탄창은 원폭을 별 다른 개조 없이 수용할 수 있었지만, 개발중이었던 b-29는
      폭탄창이 작아 원폭 탑재를 위한 개조 추가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려, 미국과 영국은 개발 실패를 대비,
      영국 폭격기 사령부내 특수 임무 부대를 차출해 승무원들에게 임무를 밝히지 않고 (일본에 대한 초장거리) 폭격 훈련에 돌입.
      b-29 보다 일찍 나온 기종이라 고고도 성능과 항속거리에게 부족했던 랭커스터는 원폭 투하를 위해,
      공중급유를 포함한 훈련을 거쳤습니다. 이미 45년 당시에 대형 4발 폭격기가 공중급유를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군요.
      원폭을 탑재한 타이거 편대 출격은 동남아의 영국 공군기지 또는 태평양의 미군 기지였는데 랭커스터 항속거리 초과로 공중 급유 필수.
      원폭 투하 랭커스터 편대 이름은 타이거였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다행히도, 원폭 수용할 수 있는 개조가 성공해 타이거 편대는 임무 해제.
      (미국이 보유한 b-17, b-24 등은 폭탄창이 작아 원폭 탑재 불가능. 새로 개발중인 b-29는 1개의 대형 폭탄창이 아닌, 2개의 폭탄창 구조라 원폭
      탑재 불가능, 기체 골격 자체를 변경해 폭탄창을 1개로 재설계해야 했는데 테스트 과정에서 몇 차례 실패했다고 하는군요. 히로시마 작전 투입
      직전에 폭탄창 개조가 완료. 영 랭커스터 폭격기는 폭탄창은 넉넉했지만, 항속거리 문제로 공중급유가 필요했는데 이미 1943년 이후 수백대의
      랭커스터기들이 급유기로 개조되었고, 실제 랭커스터 폭격기에 대한 공중급유도 44년에 프루브 방식으로 성공했다는 내용 포함.)

  • @jeimink77
    @jeimink77 년 전 +1

    지상파에서두 방영되는건가요?
    지금 제주 지역방송 jibs에서 역전다방 하고있어요

  • @Hey-gh1cu
    @Hey-gh1cu 년 전 +1

    큰 거 온다...

  • @dolphy8678
    @dolphy8678 년 전 +2

    이제서야 원자폭탄의 원리를 이렇게 쉽고 자세하게 이야기 해주신 박사님 알러뷰

  • @R2D2NEKO
    @R2D2NEKO 년 전 +1

    드디어 원폭 얘기 나오는군요..
    최소 한달~두달 분량 남았을듯..ㅋㅋㅋㅋㅋㅋ넘좋앙

    • @scz8333
      @scz8333 년 전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R2D2NEKO
      @R2D2NEKO 년 전

      @@scz8333 그만달아라 이놈아. 댓글테러하네

    • @scz8333
      @scz8333 년 전

      @@R2D2NEKO
      R2D2-3PO는 과거 정의의 반란군 테러 조력 로봇,
      R2D2는 과거 주인과 함께 우주 여기 저기를 안쑤시고 다닌데 없이 테러 아닌 테러 했는데,
      지금 네꼬D2는 뭐하고 있는 건지 참으로 어이 없는 대테러 테러. R2네꼬 프로그래머 이런 현실 알고나 있을지 모르겠네.

  • @youngraekim7072
    @youngraekim7072 년 전 +1

    국방TV 정말 즐겨봅니다. 너무 좋은 콘텐츠 감사합니다. 역정다방, 결정적하루 등등 모든 콘텐츠 너무 즐겨봅니다.
    부탁말씀 올립니다. 하나의 메뉴로 순서대로 모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chany1492
    @chany1492 년 전 +1

    아이크와 브래들리의 주요업무 패튼이랑 몽고메리 뜯어말리기

  • @footyhunter
    @footyhunter 년 전 +1

    11:10 뺨을 왜 때려요. ㅋㅋㅋㅋㅋ

  • @user-qd9kh9sm7j
    @user-qd9kh9sm7j 년 전 +1

    썸넬 맥아더 표정 왜저렠ㄲ

  • @klee4870
    @klee4870 년 전 +1

    16:34 당연히 할수 있는 생각인데 배 다 비운다는 얘기가 왤케 웃기지ㅋㅋㅋ

  • @youngjongpark9235
    @youngjongpark9235 년 전 +11

    드디어 다음주에 밀리터리사이언스스쿨을..ㅠㅠ
    저번 밀사쿨에서 자이로스코프 설명해주신후 영화 미드웨이를 보는데 잠수함 노틸러스에서 어뢰를 발사하는 장면이 나왔거든요. 근데 승조원들이
    어뢰꼬리에서 뭔가 제거한후 장전을 했는데 혹시 그게 어뢰의 자이로스코프를 가동시킨거였나요?너무 궁금합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1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user-xn4mj1wl5r
      @user-xn4mj1wl5r 년 전 +4

      @@scz8333 그만 좀 긁어오고 제발 좀 필요한 말만 해라. 사회성은 없고 자기 현시욕 엄청 강하네.

  • @Inceptor_key
    @Inceptor_key 년 전 +6

    소련군의 만주 진공도 다뤄주나요? 원폭과 함께 많이 알려지지 않은 만주 진공도 얘기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user-kr3iq6un3z
    @user-kr3iq6un3z 개월 전 +1

    패튼.마셜.아이젠하워 현역시절 모두 맥아더의 부관으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던데요.그리고 제대점수는 밴드오브 브라더스의 제일 마지막회에서도 나옵니다.제대점수 85점 이상이면 제대하고 미만이면 더 복무.

  • @user-yw7pm2ym5h
    @user-yw7pm2ym5h 년 전 +1

    궁금한게 있는데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작전은 정밀폭격으로 봐야 하나요? 지역폭격으로 봐야하나요?

  • @user-or7ls5pn2q
    @user-or7ls5pn2q 년 전 +3

    중일전쟁 합시다 한번도한적없음

  • @fierwalt
    @fierwalt 년 전 +2

    진짜 돈 내고 봐도 될거 같은 퀄리티...

  • @user-li1uw4bz7c
    @user-li1uw4bz7c 년 전 +1

    다음회차 어떻게 하려구 그래요~ 첫 아이템 너무 쎄게 잡았어요~!!

  • @user-cx7nt3rl6f
    @user-cx7nt3rl6f 년 전 +1

    원폭 기대하겠음다

    • @scz8333
      @scz8333 년 전

      B-29 원폭 투하 임무 하마터면 랭커스터에게 빼았길뻔.
      b-29 아닌 랭커스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훈련 : b-29 폭탄창 개조 혼선으로, 영공군 특임 부대 역시 원폭 투하 훈련.
      krplus.net/bidio/ZbyQa6CmdYXUmpw : Hiroshima 1945 - The British Atomic Attack
      B-29의 폭탄창은 2개로 커다란 원폭 수용 불가, 대형 폭탄창 1개로 개조 어려움 겪으며,
      만약을 위해 영국공군 랭커스터 폭격기 특수 임무 부대 차출해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훈련도 함께 병행.
      랭커스터는 B-29 보다 짧았던 항속거리 때문에 공중급유를 받으면서 원폭 투하 훈련을 했다고, 이미 43년 부터 수 백기의
      랭커스터가 공중급유기로 전환되었고, 랭커스터 폭격기에 대한 실제 공중 급유도 44년에 프루브 방식으로 성공.
      댐버스터 폭격대 이끌었던 가이 깁슨, 1944년 9월 모스키토 폭격기 임무 수행중 독 전투기와 교전 충돌 전사.
      krplus.net/bidio/ndxwp4Kpc4XKiIY : Dambusters - Guy Gibson Grave & Crash Site
      깁슨이 추락한 네덜란드 마을엔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그의 묘소가 있습니다.
      동영상의 댓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댐버스터 작전 성공 후 임무 해제되어 공군을 떠난 뒤 , 미국 방문했을 때 독일 상공으로의 작전 횟수
      얼마나 되냐는 질문. 깁슨의 답변은 174회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부여된 의무로서의 작전 횟수를 몇 배 이상 초과했죠. (기억으로 미 폭격기 승무원들 30회 정도 임무 수행하면 귀국.)
      의무 복무 채운 상태에서 깁슨은 44년 다시 공군에 복귀. 모스키토 폭격기로 임무 수행중 독일 전투기와 교전하게 되었고, 충돌로 전사.
      당시 나이는 26세 중령 추서.
      (관련 댓글
      beefabob
      1년 전
      On 4 October 1943 Gibson began a tour of The United States and whilst in Washington DC., he attended a major Press Conference at the offices of the British Information Service in New York on 7 October. This was at a time when the first American airmen were coming home 'tour expired' after 25 operations. During questions one young lady asked, 'Wing Commander Gibson, how many operations have you been on over Germany?' He replied, 'One hundred and seventy-four.' There was a stunned silence" A truly great man.
      )
      영국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2차대전 중 약 36만5천회 출격, 약 100만톤 폭탄 투하, 폭격기 손실 약 8500대.
      투입 병력 약 12만5천 중, 전사 약 5만5천, 약 8천5백 부상, 약 1만명 포로 : 승무원 사망율은 약 45%에 달할 정도로 극도로 위험했습니다.
      독일의 폭격 피해 역시 막대해서, 폭격으로 사망 약 60만,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독일의 방공포 병력 약 90만이었다고 합니다.
      독일 입장에서 2차대전 독일을 폭격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미국의 b-17이나 b-29가 아닌 랭커스터 폭격기.
      b-29는 종전 직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기에 독일 폭격엔 사용되지 않았고, 거대한 b-17의 폭장량은 모스키토 폭격기와 비슷.
      랭카스터는 44년 이후엔 1발에 5톤, 10톤 하는 톨보이와 그랜드슬램으로 독일에 강력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랜드슬램은 너무 무거워
      투하하는 순간 랭커스터 폭격기 고도가 갑자기 위로 상승할 정도.
      랭커스터는 하마터면 히로시마 원폭을 투하할 뻔 했습니다.
      랭커스터의 폭탄창은 원폭을 별 다른 개조 없이 수용할 수 있었지만, 개발중이었던 b-29는
      폭탄창이 작아 원폭 탑재를 위한 개조 추가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려, 미국과 영국은 개발 실패를 대비,
      영국 폭격기 사령부내 특수 임무 부대를 차출해 승무원들에게 임무를 밝히지 않고 (일본에 대한 초장거리) 폭격 훈련에 돌입.
      b-29 보다 일찍 나온 기종이라 고고도 성능과 항속거리에게 부족했던 랭커스터는 원폭 투하를 위해,
      공중급유를 포함한 훈련을 거쳤습니다. 이미 45년 당시에 대형 4발 폭격기가 공중급유를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군요.
      원폭을 탑재한 타이거 편대 출격은 동남아의 영국 공군기지 또는 태평양의 미군 기지였는데 랭커스터 항속거리 초과로 공중 급유 필수.
      원폭 투하 랭커스터 편대 이름은 타이거였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다행히도, 원폭 수용할 수 있는 개조가 성공해 타이거 편대는 임무 해제.
      (미국이 보유한 b-17, b-24 등은 폭탄창이 작아 원폭 탑재 불가능. 새로 개발중인 b-29는 1개의 대형 폭탄창이 아닌, 2개의 폭탄창 구조라 원폭
      탑재 불가능, 기체 골격 자체를 변경해 폭탄창을 1개로 재설계해야 했는데 테스트 과정에서 몇 차례 실패했다고 하는군요. 히로시마 작전 투입
      직전에 폭탄창 개조가 완료. 영 랭커스터 폭격기는 폭탄창은 넉넉했지만, 항속거리 문제로 공중급유가 필요했는데 이미 1943년 이후 수백대의
      랭커스터기들이 급유기로 개조되었고, 실제 랭커스터 폭격기에 대한 공중급유도 44년에 프루브 방식으로 성공했다는 내용 포함.)

    • @scz8333
      @scz8333 년 전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vinniekim6899
    @vinniekim6899 년 전 +2

    내가 물리학자들을 존경하기로했는데
    오늘 또 한번 놀람!
    밴드오브브러더스의 포인트가 이때까지 검문소로 생각했었지 제대점수라고는 생각 못했음.
    BOB를 본지 21년...그동안 100번도 넘게 보아왔고, 내 정체성의 혼란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질때마다 3화와 7화를 보곤했다.
    그런데도 포인트가 제대점수인건 오늘 처음 알았다. ㅎㅎ
    고맙습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청한 지구촌 수 많은 사람들 그 어원에 대해 잘 모를 겁니다.
      셰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 100년전쟁 아쟁꾸르 전투 직전 압도적 병력 열세 속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에게 했던 국왕의 연설 대사.
      밴드 오브 브러더스, 어원에 대해 소개합니다.
      ========================================================== ======================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용기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세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
      밴드 오브 브러더스, 미국이 제목 자체를 표절한 겁니다.
      아직 미국은 밴드 오브 브러더스와 같은 신화를 스스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전쟁 경험 자체와 미 할리웃의 창작 활동 모두에서 엄청난 수준 차이가 있음을 인지해야.
      미 할리웃 작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꼽자면 아마 이 2가지는 반드시 포함될 겁니다.
      우리말로 옮겨 보면 밴드 오브 브러더스와 얼마나 수준 차이가 나는지 바로 알게 됩니다.
      1. 스타워즈의 명 대사 ---------------------------------> 내가 니 애비다
      2. 터미네이터의 대사----------------------------------------------------------------> 내 돌아올끼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에게 최종 승리한 웰링턴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 가장 비참한 전쟁은 패배한 전쟁, 그 다음 비참한 전쟁은 승리한 전쟁
      향후 100년의 역사를 결정지은 웰링턴의 겸허한 태도와 대비되는 지극 자신감 넘쳤던 패튼,
      그리고 100년 전쟁 헨리5세의 밴드 오브 브러더스와 안드로메다급 격차의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날리기.
      미국이 아직 스스로의 신화를 만들지 못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 @vinniekim6899
      @vinniekim6899 년 전

      @@scz8333 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한수 배워갑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B-29 원폭 투하 임무 하마터면 랭커스터에게 빼았길뻔.
      b-29 아닌 랭커스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훈련 : b-29 폭탄창 개조 혼선으로, 영공군 특임 부대 역시 원폭 투하 훈련.
      krplus.net/bidio/ZbyQa6CmdYXUmpw : Hiroshima 1945 - The British Atomic Attack
      B-29의 폭탄창은 2개로 커다란 원폭 수용 불가, 대형 폭탄창 1개로 개조 어려움 겪으며,
      만약을 위해 영국공군 랭커스터 폭격기 특수 임무 부대 차출해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훈련도 함께 병행.
      랭커스터는 B-29 보다 짧았던 항속거리 때문에 공중급유를 받으면서 원폭 투하 훈련을 했다고, 이미 43년 부터 수 백기의
      랭커스터가 공중급유기로 전환되었고, 랭커스터 폭격기에 대한 실제 공중 급유도 44년에 프루브 방식으로 성공.
      댐버스터 폭격대 이끌었던 가이 깁슨, 1944년 9월 모스키토 폭격기 임무 수행중 독 전투기와 교전 충돌 전사.
      krplus.net/bidio/ndxwp4Kpc4XKiIY : Dambusters - Guy Gibson Grave & Crash Site
      깁슨이 추락한 네덜란드 마을엔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그의 묘소가 있습니다.
      동영상의 댓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댐버스터 작전 성공 후 임무 해제되어 공군을 떠난 뒤 , 미국 방문했을 때 독일 상공으로의 작전 횟수
      얼마나 되냐는 질문. 깁슨의 답변은 174회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부여된 의무로서의 작전 횟수를 몇 배 이상 초과했죠. (기억으로 미 폭격기 승무원들 30회 정도 임무 수행하면 귀국.)
      의무 복무 채운 상태에서 깁슨은 44년 다시 공군에 복귀. 모스키토 폭격기로 임무 수행중 독일 전투기와 교전하게 되었고, 충돌로 전사.
      당시 나이는 26세 중령 추서.
      (관련 댓글
      beefabob
      1년 전
      On 4 October 1943 Gibson began a tour of The United States and whilst in Washington DC., he attended a major Press Conference at the offices of the British Information Service in New York on 7 October. This was at a time when the first American airmen were coming home 'tour expired' after 25 operations. During questions one young lady asked, 'Wing Commander Gibson, how many operations have you been on over Germany?' He replied, 'One hundred and seventy-four.' There was a stunned silence" A truly great man.
      )
      영국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2차대전 중 약 36만5천회 출격, 약 100만톤 폭탄 투하, 폭격기 손실 약 8500대.
      투입 병력 약 12만5천 중, 전사 약 5만5천, 약 8천5백 부상, 약 1만명 포로 : 승무원 사망율은 약 45%에 달할 정도로 극도로 위험했습니다.
      독일의 폭격 피해 역시 막대해서, 폭격으로 사망 약 60만,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독일의 방공포 병력 약 90만이었다고 합니다.
      독일 입장에서 2차대전 독일을 폭격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미국의 b-17이나 b-29가 아닌 랭커스터 폭격기.
      b-29는 종전 직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기에 독일 폭격엔 사용되지 않았고, 거대한 b-17의 폭장량은 모스키토 폭격기와 비슷.
      랭카스터는 44년 이후엔 1발에 5톤, 10톤 하는 톨보이와 그랜드슬램으로 독일에 강력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랜드슬램은 너무 무거워
      투하하는 순간 랭커스터 폭격기 고도가 갑자기 위로 상승할 정도.
      랭커스터는 하마터면 히로시마 원폭을 투하할 뻔 했습니다.
      랭커스터의 폭탄창은 원폭을 별 다른 개조 없이 수용할 수 있었지만, 개발중이었던 b-29는
      폭탄창이 작아 원폭 탑재를 위한 개조 추가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려, 미국과 영국은 개발 실패를 대비,
      영국 폭격기 사령부내 특수 임무 부대를 차출해 승무원들에게 임무를 밝히지 않고 (일본에 대한 초장거리) 폭격 훈련에 돌입.
      b-29 보다 일찍 나온 기종이라 고고도 성능과 항속거리에게 부족했던 랭커스터는 원폭 투하를 위해,
      공중급유를 포함한 훈련을 거쳤습니다. 이미 45년 당시에 대형 4발 폭격기가 공중급유를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군요.
      원폭을 탑재한 타이거 편대 출격은 동남아의 영국 공군기지 또는 태평양의 미군 기지였는데 랭커스터 항속거리 초과로 공중 급유 필수.
      원폭 투하 랭커스터 편대 이름은 타이거였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다행히도, 원폭 수용할 수 있는 개조가 성공해 타이거 편대는 임무 해제.
      (미국이 보유한 b-17, b-24 등은 폭탄창이 작아 원폭 탑재 불가능. 새로 개발중인 b-29는 1개의 대형 폭탄창이 아닌, 2개의 폭탄창 구조라 원폭
      탑재 불가능, 기체 골격 자체를 변경해 폭탄창을 1개로 재설계해야 했는데 테스트 과정에서 몇 차례 실패했다고 하는군요. 히로시마 작전 투입
      직전에 폭탄창 개조가 완료. 영 랭커스터 폭격기는 폭탄창은 넉넉했지만, 항속거리 문제로 공중급유가 필요했는데 이미 1943년 이후 수백대의
      랭커스터기들이 급유기로 개조되었고, 실제 랭커스터 폭격기에 대한 공중급유도 44년에 프루브 방식으로 성공했다는 내용 포함.)

    • @scz8333
      @scz8333 년 전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user-ri2dd5jo9m
    @user-ri2dd5jo9m 년 전 +1

    으아니! 핵분열 설명에서 왜 끊어여 ㅠㅠ

    • @scz8333
      @scz8333 년 전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user-qv4md7nb4c
    @user-qv4md7nb4c 년 전 +1

    얼마 안 본거 같은데
    벌써 46화네

  • @littlecloud78
    @littlecloud78 년 전

    궁금합니다. 중일 전쟁에서 구 일본제군은 중국군을 중경까지 밀어버렸는데 미군은 실패했을까요?

  • @han1892
    @han1892 년 전 +2

    30:47 노트북 디스플레이 얇은거봐봐 개쩌네

    • @mgjgddrng12
      @mgjgddrng12 년 전 +1

      그런게 보이나요 ㅋㅋ

    • @user-se2my1ye1m
      @user-se2my1ye1m 년 전 +1

      테이블 틈이랑 겹쳐져서 디스플레이 없어진줄 ㅡㅡ

    • @han1892
      @han1892 년 전 +1

      @@user-se2my1ye1m 케이블 틈만큼이나 디스플레이가 얇네요 ㅋㅋㅋㅋ

  • @spicewolf2223
    @spicewolf2223 년 전 +4

    원자폭탄 저걸 컴퓨터 없이 만들어냈다는건데.. 다음주 기대돱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scz8333
      @scz8333 년 전

      컴퓨터 없이 컴퓨터가 만들어졌기에 별로 놀랄 일도 아닐 겁니다.

  • @user-zu3ut7ol7h
    @user-zu3ut7ol7h 년 전 +1

    최소오 대장?

  • @lastsailor
    @lastsailor 년 전 +1

    너무 짧네요....

  • @han7594
    @han7594 년 전

    유교에 오염되지 않은.. 동이족의 문화가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으니

  • @japs760410
    @japs760410 년 전 +1

    맥아더랑 패튼이 같은 시어터에....???
    그자리에 없어도 뭐 같다!!!!

    • @user-xn4mj1wl5r
      @user-xn4mj1wl5r 년 전

      의외로 둘다 서로 눈치 보느라 별 일 없을 수도 있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임.

  • @UlSan-xh5mq
    @UlSan-xh5mq 년 전

    허준 웃는소리 촐싹맞아

  • @tlqkfspdlqj
    @tlqkfspdlqj 년 전 +1

    와 대박 밀사쿨 2일 남았습니다 제가 이제 봤습니다 개이득 착시

    • @scz8333
      @scz8333 년 전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이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에 비로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하지만 결국 풍부한 미국의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
      기반이 맨허튼 프로젝트 주도해 핵무기 완성.
      관련 링크 때문인지 글이 삭제되어 링크를 제외하고 다시 올립니다.

  • @Dasiro-Barogo
    @Dasiro-Barogo 년 전 +1

    허준이 이영자와 닮았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 @sticker2775
    @sticker2775 년 전 +1

    역사의 변곡점에는 언제나 미친놈들이 등장합니다
    그걸 막으면 나라가 오래가고 막지 못하면...

  • @patrickyu8552
    @patrickyu8552 년 전 +7

    채교수님 이 말을 가장 많이 하셨지만
    여기 있는 샤를세환이나 소령님도 각본없이 마이크대도 다 술술 하실 듯

  • @niqst
    @niqst 년 전 +2

    아 이걸 여기서 끊네 ㅋㅋㅋㅋㅋㅋ

  • @user-rt1xt6qm8u
    @user-rt1xt6qm8u 년 전 +5

    스팀슨 교토공습 안하는 이유가 뭘까 🤔?!

    • @Fje8xjd
      @Fje8xjd 년 전

      니엄마 때문에 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