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HD역사스페셜 - 대각국사 의천은 왜 송나라 밀항했나 / KBS 2006012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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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일 2022. 01. 20.
  • - 고려 왕의 동생이 몰래 송나라로 빠져나가다
    초파일을 맞아 화려한 연등회 행사로 불야성을 이룬 1085년의 개경.
    이날 의천 일행은 개경을 몰래 빠져나와 송나라 상인의 배에 몸을 싣는다.
    ‘밀항’이었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여 불과 13세에 불교계 최고위직 ‘승통’의 자리에 오른 의천. 고려의 왕자이자, 오늘날 가톨릭으로 치면 추기경에 해당하는 신분의 의천이 밀항까지 감행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 중국 항주의 혜인사, ‘고려사’로 불린 까닭은?
    밀항으로 들어온 의천을 송나라 조정에서는 각별하게 관리했다. 중국 항주의 혜인원은 당시 무명의 절이었으나, 의천이 머물면서 고려와 송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사찰로 부상한다. 당시 항주 시민들은 혜인원을 고려사로 불렀다는데..
    고려왕자인 의천이 금으로 쓰인 170권의 불경 3부를 기증하고 막대한 시주를 하면서 혜인원이 대대적인 중건을 하게 된 까닭이다. 2만 리 넘는 의천의 송나라 여정을 중국 현지 취재를 통해 따라가 봤다.
    - 10년에 걸친 동아시아 불교연구서의 집대성, ‘교장’ 간행
    송에서 3천 권의 서적을 갖고 귀국한 의천은 이후에도 국내는 물론 송과 거란, 일본에서 교장(불교 경전을 해석하거나 분석한 불교경전연구서)을 수집해 총 4,700여 권의 총록을 만들고 간행했다. 무려 10년에 걸친 대사업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대장경 연구서를 모두 모은 방대한 규모였다. 그동안 의천의 교장은 석가모니의 설교를 기록한 대장경의 속편인 ‘속장경’으로 잘못 불려져 왔다.
    의천이 간행한 ‘교장’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본다.
    - 천태종 개창에 숨은 뜻은 무엇인가?
    당시 고려 불교계는 왕실 중심의 화엄종과 문벌귀족이 후원하는 법상종으로 크게 양분되었고, 제3의 종단인 ‘선종’이 있어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다. 인주이씨를 중심으로 세력이 커져가던 법상종에 대응해, 화엄종 승려였던 의천은 불교계 개편을 시도한다. 선종 승려 1,000여 명을 끌어들여 법상종의 세력 축소를 도모한 의천, 그의 불교계 개편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 화폐주조를 주도한 승려? 문벌귀족에 맞선 숙종의 개혁정치 파트너
    [대각국사문집]의 ‘주전건의상소문’에는 중국 화폐의 역사를 비롯한 의천의 해박한 화폐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다. 이것이 숙종에게 받아들여져 비로소 고려에 화폐가 널리 활용된다. 승려인 의천이 왜 화폐주조에 적극 나선 것일까?
    인주이씨를 중심으로 하는 문벌귀족이 세력을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 숙종은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경천도’와 ‘군사개혁’, ‘화폐주조’ 등의 개혁정치를 꾀한다. 그 중에서도 주전론은 국가가 경제권을 장악하도록 만든 핵심적인 개혁안이었다. 불교사상가 뿐만이 아니라, 문벌귀족에 맞서 사회변화를 모색했던 의천의 활약을 살펴본다.
    HD역사스페셜 34회 - 대각국사 의천은 왜 송나라 밀항했나 (2006.1.27.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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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35

  • @user-wv3xf7jl4y
    @user-wv3xf7jl4y 2 년 전 +15

    역사스페셜은 종방하면 안되는거였어요.지금도 미래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국영방송이 게을러서 그런거라고 밖에..정부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 @ack3145
    @ack3145 2 년 전 +5

    저 시대 배경으로 토탈워 게임 만들면 재미있을 듯.

  • @seokinsong6154
    @seokinsong6154 2 년 전 +2

    이게 무슨 밀항이야?...ㅎ

  • @user-xb7qw3uu8m
    @user-xb7qw3uu8m 2 년 전 +2

    건물의 기둥과 척추는
    임무 수행 방법이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의 기둥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척추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허리는 인체의 대들보’라고 하면서 건물의 기둥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의 기둥과 척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혀 다릅니다. 건물의 기둥은 움직이지 않고 견고하게 버텨야 합니다. 인간의 척추도 상체를 짊어 지고 버티는 면에서는 같으나 척추는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점에서 건물의 기둥과는 전혀 다릅니다.
    건물의 기둥은 부식되거나 망가지면 기둥이나 철판으로 교체하거나 용접을 하여 보강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인간의 척추는 어긋나거나 금이 가면 건물의 기둥처럼 쇠막대를 대고 나사못을 박아 보강하면 굽혔다 폈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허리 본래의 기능을 상실합니다.
    사람들은 말 합니다. 쇠가 오래되면 녹이 슬듯이 인간의 허리 뼈도 오래되면 수술을 하여 보강해야 된다고. 그러나 쇠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지만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므로 단련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건물의 기둥과 척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허리가 구부러져 꼬부랑 노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이 아니고 허리 주변 근육이 약해져서 굽게 되는 것입니다. 철봉에 매달리고 등산 등의 운동으로 허리 주변 근육을 단련하면 허리 수술을 하지 않고도 오랜 동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온갖 허리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수술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소견입니다.
    (사람은 왜 목.허리.무릎이 아플까? 저자 법무사 이 희 숙 지음 4쇄본 본문 중에서 )
    졸저에는 히포크라테스와 고대 그리스 의사들의 허리 치료 방법도 소개하였습니다.
    남한산성허리튼튼체험장 운영
    사람은 왜 목.허리.무릎이 아플까?
    저자 법무사 이 희 숙 서초동

  • @user-vw5kd4or6o
    @user-vw5kd4or6o 2 년 전 +7

    역사는 매금이에게 물어보면 다 알려준다!! 본인이 역사책이고 모든것은 다 무지하고 거짓말이다!! 매금이를 교육부 장관으로 추천하자!! 매금이가 하는 말이 곧 역사 아닌가?? 그치 매금아?

  • @user-cs9zb6it5c
    @user-cs9zb6it5c 2 년 전 +3

    지금의 스님들을 보면 배에 기름지고
    속세에 찌들고 수행과 자비는 온데간데 없다는

  • @OYT0724
    @OYT0724 2 년 전 +2

    14:54 여러분 진짜 재미있는 사실 알려 드릴까요?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신라가 비열홀이라는 산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음. 그러다 훗날 당나라 영토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중국 산둥성의 등주, 삭주, 내주라는 것.
    또한 랴오닝성이 우수주, 삭주 또는 수약주임. 한마디로 당시 고구려와 신라는 랴오닝성과 산둥성에 이미 진출해 있었다는 것. 한때 랴오닝과 산둥이 비열홀이라는 같은 주로 관리되다가 삼국시대 중간부터 다른 주로 분리가 되었던 것 같음.
    삼국사기에 뻔히 존재하는 내용인데 식민사관 지지자들은 신라 역사 축소시키느라 일부러 관심을 안주고, 환빠들은 환빠들대로 고구려, 백제 과대해석 해대느라 신라에 관심이 없음.
    ......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기림 이사금
    비열홀로 가 백성을 보살피다 ( 300년 02월(음) )
    〔3년(300)〕 2월에 왕이 비열홀(比列忽)註 001로 나아가 나이가 많고 가난한 사람들을 몸소 위로하고 〔사람에 따라〕 차등을 두어 곡식을 하사하였다.
    태백에서 망제를 지내고, 낙랑과 대방이 복속하다 ( 300년 03월(음) )
    〔3년(300)〕 3월에 우두주(牛頭州)註 001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에서 망제(望祭)註 002를 지냈다.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양국註 003이 항복하여 복속해 왔다.
    ......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
    비열성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로하다 ( 481년 02월(음) )
    3년(481) 봄 2월에 비열성(比列城)註 001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내려 주었다.
    ......
    삼국사기 권 제35 잡지 제4
    지리(地理)二 신라(新羅)
    삭주
    삭주(朔州)註 270는 가탐(賈耽)註 271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註 272에 이르기를, “고구려(句麗)註 273의 동남쪽이자 예(濊)註 274의 서쪽은 옛맥(貊)의 땅이며, 대개 지금 신라(新羅)註 275의 북쪽인 삭주이다.”라고 하였다.
    선덕왕(善德王)註 276 6년·당(唐)註 277 정관(貞觀)註 278 11년(637)에 우수주(牛首州)註 279로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한편 문무왕(文武註 280王)註 281 13년·당(唐) 함형(咸亨)註 282 4년(673)에 수약주(首若州)를 설치했다고 이른다.경덕왕(景德王)註 283이 삭주(朔州)註 284로 고쳐 삼았다. 지금은 춘주(春州)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3개이다.
    삭정군
    삭정군(朔庭郡)註 384은 본래 고구려(高句麗)註 385비열홀군(比列忽郡)이었는데 진흥왕(眞興王)註 386 17년·양(梁)註 387 태평(太平)註 388 원년(556)에 비열주(比列州)로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효소왕(孝昭王)註 389 때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1180보(步)이다. 경덕왕(景德王)註 390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등주(登州)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5개이다.
    ......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평양성과 장안성 ( 427년 (음) )
    (중략)
    평양성(平壤城)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과 같으며, 그리고 패수(浿水)註 035는 곧 대동강(大同江)이다. 어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산굽이를 따라 외성을 둘렀고, 남으로 패수(浿水)가 근처에 있다.”라 하였으며, 또한 《지(志)》에서 이르기를 “등주(登州)註 036에서 동북으로 바닷길을 가서, 남으로 해안에 연하여, 패강(浿江)註 037 입구의초도(椒島)註 038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에 닿을 수 있다.”라 하였다.
    또한 수양제(隋煬帝)註 039의 동방 정벌 조서에서 이르기를 “창해(滄海) 방면 군대는 선박이 천 리에 달하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나아가고, 커다란 군함은 구름처럼 날아 패강(浿江)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平壤)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써 지금[고려]의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인 것은 명백하며, 곧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이었던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또 장안(長安)이라고 불렀다.”라 하였고, 그리고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평양(平壤)으로부터 장안(長安)으로 옮겼다”라 하였으니, 곧 두 성이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웠는지에 대해서는 곧 알 수가 없다.
    ......
    삼국사기 권 28 신라본기 제8 성덕왕
    당나라 현종이 발해 공격을 요청하다 ( 733년 07월(음) )
    32년(733) 가을 7월에 당나라 현종(玄宗)註 001이 발해말갈(渤海靺鞨)註 002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註 003로 들어와 침범하였으므로,註 004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註 005 김사란(金思蘭)註 006을 귀국시켜, 〔왕에게〕 관작을 올려주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註 007 영해군사(寧海軍使)註 008로 삼고,註 009 군사를 일으켜 말갈(靺鞨)註 010 남쪽 변방을 치게 하였다.
    ......
    삼국사기 권제12 신라본기 제12 경명왕
    견권이 말갈족을 물리치다 ( 921년 02월(음) )
    〔5년(921)〕 2월에 말갈(靺鞨)註 001 별부(別部) 달고(達姑)註 002의 무리가 북쪽 변경에 와서 사람들을 해치고 도적질을 하였다. 이때 태조의 장수인 견권(堅權)註 003이 삭주(朔州)註 004를 지키고 있었는데,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크게 격파해서,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신과 편지를 보내 태조에게 사례하였다.註 005
    ......
    삼국사기 권50 열전 제10
    견훤(甄萱)
    거란과 교섭하다(0927년 (음))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예물을 갖고 왔다. 견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시켜 마돌 등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항해하여 북쪽으로 가다가 바람을 만나 당나라 등주에 도착하여 모두 형벌을 입어 죽음을 당했다.

    • @OYT0724
      @OYT0724 2 년 전

      참고로 고려시대에도 등주라는 고려 영토가 있었음. 그런데 고려시대에 뜻하는 등주는 만주 랴오냥시 위치만을 뜻했던 것 같음. 통일신라 때 산둥 등주를 잃고 나서 랴오닝 등주만이 남았던 것 아닐까 추측. 달고적이 신라를 치러 가는데 등주를 통과하니 고려가 막아줬다는 내용도 나오고, 등주가 공격당할때 마다 서쪽이 아닌 동계병마사 또는 동북면병마사의 보고가 나옴.
      .....
      고려사 세가권제1 태조 4년
      2월 임신 달고적(達姑狄) 171명이 신라(新羅)를 공격하러 가는데, 길이 등주(登州)를 통과하니 장군 견권(堅權)이 맞아 싸워 크게 패배시켜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명하여 공이 있는 사람에게 1인당 곡식 50섬씩을 하사하니, 신라왕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사례하였다.
      .....
      고려사 세가 권제24 고종 40년
      2월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가 급히 보고를 올리기를, “동진(東眞)의 군사 300기(騎)가 등주(登州)를 포위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병오 초하루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가 몽고군이 등주(登州)를 포위하였으나 포위를 풀고 금양성(金壤城)으로 향했다고 보고하였다.
      고종 43년
      병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보고하기를, “등주성(登州城) 안에는 물이 없고 또 저장해 둔 곡식도 없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가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섬으로 입보(立保)하라고 하였다.
      .....
      고려사 권58 지 권제12 지리3 동계 안변도호부 등주
      연혁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는 본래 고구려의 비열홀군(比列忽郡)【천성군(淺城郡)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진흥왕(眞興王) 17년(556)에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에 삭정군(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등주(登州)라고 불렀다. 성종 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현종 9년(1018)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고종 때에 정평(定平) 이남의 여러 성(城)이 몽고(蒙兵)의 침입을 받자 강릉도(江陵道) 양주(襄州)에 임시로 머물렀다가, 다시 간성(杆城)으로 옮겨 거의 40년을 지냈다. 충렬왕 24년(1298)에 각자 본성(本城)으로 돌아갔다. 별호(別號)는 삭방(朔方)이다【성종[成廟] 때 정하였다.】. 국도(國島)가 있다. 속현(屬縣)이 7개, 관할하는 방어군(防禦郡)이 9개, 진(鎭)이 10개【사(使)가 3개, 장(將)이 7개이다.】, 현령관(縣令官)이 8개이다.

    • @user-du7st2zc8v
      @user-du7st2zc8v 2 년 전 +1

      댓글이 ㅈ문가스러운게 매금이 부캐같은데

    • @OYT0724
      @OYT0724 2 년 전 +1

      @@user-du7st2zc8v 현대 국정교과서에 잘못된 내용이 있는걸 지적했다고 무조건 환빠 취급 하시는 것 같은데, 국정교과서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환빠인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제 주장의 근거로 고서 자료 출처를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비방을 하실려면 최소한 잘못되었다는 반박자료를 가져와서 제대로 따져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채널에서 활동한지 3년이 넘어갑니다만... -_-;;;... 매금이 같은 환빠들이 신라 흉노 김씨설 같은 헛소리를 할때마다 근거자료 찾아서 맨날 반박논쟁을 벌여왔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함부로 ㅈ문가네 부캐네 비방하는 것은 매우 수준이 낮습니다. 역사채널에 댓글을 남기신걸 보면 최소한 역사에 대해 관심은 있으신 분이신 것 같은데, 삼국사기는 직접 읽어라도 보고 삼국사기 내용을 비판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도 안해놓고 아는척 하는 사람은 한국사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 @user-kt8yp5ho2y
    @user-kt8yp5ho2y 2 년 전 +4

    근데 의천대사가 추진한 화폐개혁도 의미 없는게 은병과 해동통보는 개경에서만 유통되고 타 지역에선 상평통보 유통 이전의 조선시대와 같이 소금, 삼베, 곡식, 그리고 계란으로 물물교환을 했음. 이유는 바로 화폐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조건과 인식이 부족했음.

    • @user-kt8yp5ho2y
      @user-kt8yp5ho2y 2 년 전 +2

      @동해안오징어 물론 의미가 있었지만 그 당시 고려도조선 초중기 처럼 국내의 시장이 발달하지 못했고 또 화폐는 대외무역에만 이용하다 보니 반쪽 성공만 하다 숙종의 뒤를 이은 예종이 결국 폐지했죠.

    • @user-rs3zf8er4c
      @user-rs3zf8er4c 2 년 전 +1

      고려는 벽란도와 개경 해상로 거치는 몇 항구와 그외 나머지 지역이 너무 격차가 커요.지방은 아예 시장이 없었대요.은병 은정 고액권은 무역에 써도 일반화폐는 안먹힌거죠.원 건국후 한동안 무역이 좋았거든 원 교초 사용했다 고려 말에 그 난리가 난거 아니에요.

    • @user-kt8yp5ho2y
      @user-kt8yp5ho2y 2 년 전 +1

      @@user-rs3zf8er4c 맞죠. 상평통보를 다른 화폐에 비해 널리 퍼진 이유도 바로 국내시장이 발달하면서 퍼진거죠.

  • @user-gc6zb1zy5j
    @user-gc6zb1zy5j 2 년 전 +2

    밀항은 늬미 왕족출신인데 뭔 밀항임

  • @user-qo7hw5cf3f
    @user-qo7hw5cf3f 2 년 전

    ,,,,

  • @user-np7kx8dh3c
    @user-np7kx8dh3c 2 년 전

    부처상이 김정은 닮았내...

  • @jindo333333
    @jindo333333 2 년 전

    대한불교천대종 원장이라는자가 웬말을그리도 조용히 낮게한단말이냐? 그야말로 우라질놈이구만..

  • @user-if5zb5rc1o
    @user-if5zb5rc1o 2 년 전 +2

    저 천태종 총무원장 돈독 오른 땡중은 아닌가?! 왠지 스님이 스님으로 안보이네
    내가 세속적인건가

  • @user-vd3fe6bj7y
    @user-vd3fe6bj7y 2 년 전 +3

    이러고도 중원한족이 한민족의 주적이라고 씨부리는 쌥새들은 무엇이지... 중국의 역대왕조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은것이 사실인데... 전쟁도 가끔 잇엇지만... 지리학적이나 정치학적으로 볼때 서로 떼여낼수없는 사이엿음이 충분하다.

  • @wa8514
    @wa8514 2 년 전

    일본이 훔쳐간거고 조작.왜곡…

  • @user-jv9pv5eg8v
    @user-jv9pv5eg8v 개월 전

    ㅋㅋ. 남북이란다.
    북한에 종교가 어딨나?
    모두가 아는걸 KBS는 어찌 이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