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본 영화 한산 (임진왜란, 한산대첩,거북선, 실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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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일 2022. 08. 11.
  • @history_jaewonSSaem
    오늘은 김재원 역사학자님과 함께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을 이야기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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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679

  • @oo00oo00oo
    @oo00oo00oo 년 전 +200

    일일이 다 기록되지 못한 묻혀진 사실들이 어쩌면 영화 속 꾸며진 이야기 보다도 더 영화 같았을지도

    • @user-kd4uy1px8m
      @user-kd4uy1px8m 년 전 +10

      (거북선의 머리는 들락거렸다)는 방송을 보시면 거북선에 대한 일본기록도 자세히 나옵니다!

    • @bedenhelm
      @bedenhelm 년 전 +16

      다른 예로 사랑과전쟁같은 프로에서 실제사연대로하면 방송이 절대 안된다고 각색을 했는데도 자극적이라고 욕먹은적이 있었죠. 실제는 상상을 더 초월하는데...ㅋ
      때로는 현실이 극을 뛰어넘죠 ㅋㅋㅋ

    • @user-bk9jp1vd3g
      @user-bk9jp1vd3g 년 전 +2

      애초에 전투결과만봐도 너무 극적이라 어떻게 그려내도 우리나라 사람들 입장에선 극적인 감동이 있을수밖에 없는듯

    • @hiroono1
      @hiroono1 년 전

      @@user-kd4uy1px8m 이순신이 23전 23승이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한산도 전투까지의 3회 정도이며, 그 후의 20전은 모두 지고 있다. 덧붙여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웠다는 당시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순신에 관한 일화는 대부분 거짓말이다. 와키자카는 미역을 먹지 않았고,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적도 없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백의병에 빠진 이유는 패전이 이어져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일본군에 대해 13척으로 싸운 나루보 해전에서는 일본의 크루시마를 죽였지만, 그 후 조류가 바뀌자 200km도 북쪽으로 패주했다. 한국인은 그 싸움도, 조선군의 2번째의 전멸이 된 순천해전도, 이순신이 죽은 노량 해전도 이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리석다.

  • @psuu009
    @psuu009 년 전 +95

    자막오류가 많네요! 10:40 복카이센은 바다괴물이라는 뜻이고 메쿠라부네가 장님배라는 뜻입니다
    역사학자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이번에 한산을 너무 재밌게봐서 관련 영상 이것저것 찾아보고있는데 흥미롭네요 특히 포가 터지는게 아니었다니 또 하나 알아갑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그 당시 나라를 위해 힘써주신 분들을 기리고 이순신 장군님의 업적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 한산과 같은 영화의 순기능같아요 아무래도 극적인 효과를 위해 영화적 요소가 추가되긴 했지만 그덕분에 재밌게 영화를 관람한 후, 이렇게 실제 역사를 찾아보고 영화와 비교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네요 전 한산 4회차 관람 계획중입니다

    • @gold2dariusmaster
      @gold2dariusmaster 년 전

      ㄷㄷ

    • @hiroono1
      @hiroono1 년 전

      조선의 수군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했던 것은 일본군이 충분한 장비를 하고 있지 않은 7월 7일까지의 2개월만이다. 그 이후에는 조선군은 모든 전투에 패배하고 있다.
      거북선이 실전에 출격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격하지 않은 거북선이 일본선과 충돌할 리가 없고, 이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은 날조이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 @hiroono1
      @hiroono1 년 전 +1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 @psuu009
      @psuu009 년 전 +13

      @@hiroono1 애쓴다

    • @hiroono1
      @hiroono1 년 전 +1

      @@psuu009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를 가상의 괴수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거북선을 타는 이순신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오인하고 있다. 한국인 이외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한국의 조직적인 역사 날조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 @rksldk5539
    @rksldk5539 년 전 +43

    ㄹㅇ 공감이 많이 되네요...

    • @hiroono1
      @hiroono1 년 전 +2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 @hiroono1
      @hiroono1 년 전 +1

      @@user-ki7xz6xw3u 날조된 역사를 믿어도 아무것도 장점은 없다.

    • @psuu009
      @psuu009 년 전

      @@hiroono1 중국인이냐

    • @user-ze6of8nx6x
      @user-ze6of8nx6x 년 전

      내 단독 대글 참조

    • @user-ze6of8nx6x
      @user-ze6of8nx6x 년 전

      여야 한편 대글도 참조

  • @user-kt4bl4pv8b
    @user-kt4bl4pv8b 5 일 전

    김재원 선생님 강의.잘 듣고 있습니다. 😊😊❤❤ 다른 컨텐츠도 통찰력있는 설명이 시원할때가 많습니다.
    교수님 포에버❤❤❤~~~~~

  • @sugarissugar
    @sugarissugar 년 전 +2

    역사 얘기 재밌게 잘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 @user-sp1wc9lj7y
    @user-sp1wc9lj7y 년 전 +16

    9:23 안골포쪽 일본군 장수의 이름과 초상화 오류가 있습니다.
    고니시 가토가 아니라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도도 다카토라 입니다 또한 초상화는 둘다 가토 기요마사의 초상화 입니다. 3:33도 동일한 초상화 오류네요

    • @Chonny523
      @Chonny523 년 전

      그거뿐만 아니죠. 초반에 가토 기요마사 초상화보고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츠나리 초상화보고 가토 기요마사

    • @user-sp1wc9lj7y
      @user-sp1wc9lj7y 년 전

      @@Chonny523 둘다 가토에요 ㅋㅋ

  • @user-qs2hp5rw1e
    @user-qs2hp5rw1e 년 전 +6

    역사적 측면으로 다가서니까 더욱 어떻게 그 해전을 이기셨을까 대단할뿐이다...

  • @user-ls9qb3ls3r
    @user-ls9qb3ls3r 년 전 +4

    뭔가 팩트를 잘 전달하는 분인듯. 말씀이 신뢰가 갑니다. 잘 봤습니다.

  • @user-ic5pg2cy2u

    즐거운 영상😁

  • @youngdays4008
    @youngdays4008 년 전

    역사의 재원쌤이다!!!

  • @user-tc9fh4oo7o
    @user-tc9fh4oo7o 년 전 +29

    마지막에 우스겟소리로, 바닷바람 많이 맞으시면서 고생하시다보니 많이 삭으셨을 것이다 라고 하신 부분이 있는데, 기록상에도 수군이 너무 힘들다보니 입영하여 군역을 치르는 것을 기피하는 풍조가 있어서, 대대손손 수군으로 복무시키는 백성들도 따로 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순신 통제사께서도 많이... 삭으셨겠죠..?

    • @snubug
      @snubug 년 전 +1

      해군 출신은 이해 함

  • @hindoong22
    @hindoong22 년 전 +1

    와우 말씀 너무 잘 하셔서 엄청 집중해서 봤어요. 덕분에 또 이렇게 지식을 배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user-ow6yb3wo2s

    재원쌤이다!!!!

  • @dumbbell2472
    @dumbbell2472 년 전 +3

    항상 재원쌤은 찐이닷♡

  • @wanggun80
    @wanggun80 9 개월 전

    너무 재밌다 ㅋㅋㅋ

  • @user-ki6rs3wj7z
    @user-ki6rs3wj7z 년 전 +3

    09:23 이때 두 장수가 가토 요시야키라고 가토 기요마사랑은 다른 인물이고 고니시는 북상중 이어서 없었던거 아닌가요? 아마 구키 요시타가 또는 도도 다카토라 아닐까 합니다

    • @user-hn6my7ez4z
      @user-hn6my7ez4z 년 전 +3

      당시 안골포에 있었던 일본 장수는
      구키 요시타카 랑 가토 요시아키 맞아요.

  • @user-ji4gz6zd7c
    @user-ji4gz6zd7c 년 전 +10

    김재원쌤 역시 설명 재미있습니다 ㅋㅋ 책잘보고 있습니다

    • @hiroono1
      @hiroono1 년 전 +1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 @tpsong
    @tpsong 년 전 +65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엄청 많아 보이심 ㅋㅋ

  • @poongsin
    @poongsin 년 전

    간략하게 알맹이만 쏙쏙 재밌네요

  • @user-nw1ii8hr8w
    @user-nw1ii8hr8w 년 전 +5

    좋아요누름 😇

  • @hoon9720
    @hoon9720 년 전 +74

    일본군에게 의를 향한 한마음 얘기하실때
    일본군이 이순신장군한테 의 와 불의의 싸움이라는 말에 현혹된게 아니라 자기가 모시는 사람은 살기위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던데 당신은 부하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걸 보고
    놀랐다고 하죠 그래서 마음을 돌린게 가장 클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가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비밀을 지키려고 하는거도 그렇구요

    • @psuu009
      @psuu009 년 전 +14

      저도 이렇게 생각해요 부하를 지키기위해 직접 나선 이순신을 보고 놀랐다고 이야기 하죠 그리고 준사입장에선 무분별한 전쟁을 치르며 이미 많이 지치고 전쟁에 대한 의미를 잃은듯 해보였어요 아무래도 빼앗기위한 싸움에서 가지는 마음가짐은 지키기위한 싸움에서 갖는 마음가짐에 비해 의미가 크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순신에게도 이 전쟁은 뭐냐고 물은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나름대로 준사가 일본을 등진 배경에 대한 이해가 쉬웠는데 사람마다 다른가봐요

    • @hiroono1
      @hiroono1 년 전 +1

      그 이야기는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mool_tissue
      @mool_tissue 년 전 +13

      실제로는 왜군이 조선군에 붙으면 대가로 땅도주고 결혼도 시켜주고 벼슬도 내려주고 했습니다. 의를 향한 마음만 갖고 되는게 아니죠.

    • @gabihj7932
      @gabihj7932 년 전 +5

      그러니까 단순히 그런마음때문에 등을 돌린게 아니라고 영상에서 말했음.. 적장수의 그런모습을 보고 감동받을순있지만 동족을 죽여야하는 입장이되는데 물질과 명예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고봄

    • @hiroono1
      @hiroono1 년 전

      @@kimjs3030 거짓말이다.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무엇이든 날조한다.

  • @user-nn6ov9kp4g
    @user-nn6ov9kp4g 년 전 +1

    엠장기획에서 봤는데 여기서도 뵙네요~~~^^ 더 잘 되시길 바랍니다. 김재원쌤

  • @user-dh9rn6im1v
    @user-dh9rn6im1v 8 개월 전

    재원쌤 반갑습니다~~^^

  • @gabihj7932
    @gabihj7932 년 전 +11

    영화와 실제 차이점
    1. 항왜를 한 일본인들은 많았지만 영화처럼 의,불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더 많은 이유가 있었을것이다.
    2. 한산대첩 전 일본장수들은 싸우지 않았다, 실제 와키자카는 유인책에 당했다.
    3. 수군의 주력은 활이다. 포는 터지는게 아니라 적의 배를 부시고 침몰시키기 위함이다.
    4. 거북선은 침투하여 충파의 목적으로 쓰인게 아니라 적을 당황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배였다.

    • @psb598
      @psb598 년 전 +1

      거북선은 그 모습이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학자분도 거북선의 모습이나 용도에 대한 사실을 전달하기보단 4번처럼 추측을 한거죠

    • @inx2853
      @inx2853 년 전

      @@psb598 그당시 거북선이 어떤지는 안보이지만 후대에 거북선은 그림이 있긴하던데

    • @sower37
      @sower37 년 전

      @@inx2853 후대의 기록도 결국 상상력이 가미될 수 밖에 없죠. 그 기록이 무엇을 기반으로 그려진 건지 알 수 없으니까요.

    • @hiroono1
      @hiroono1 년 전

      @@psb598 이순신이 23전 23승이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한산도 전투까지의 3회 정도이며, 그 후의 20전은 모두 지고 있다. 덧붙여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웠다는 당시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순신에 관한 일화는 대부분 거짓말이다. 와키자카는 미역을 먹지 않았고,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적도 없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백의병에 빠진 이유는 패전이 이어져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일본군에 대해 13척으로 싸운 나루보 해전에서는 일본의 크루시마를 죽였지만, 그 후 조류가 바뀌자 200km도 북쪽으로 패주했다. 한국인은 그 싸움도, 조선군의 2번째의 전멸이 된 순천해전도, 이순신이 죽은 노량 해전도 이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리석다.

  • @beaver_savage
    @beaver_savage 년 전 +11

    역시 역사는 팩트 설명해주는게 꿀잼임

    • @jhbp12
      @jhbp12 년 전

      팩트?

    • @user-xy8km4zd1e
      @user-xy8km4zd1e 10 개월 전

      팩트가 아닌 역사학자의 합리적 주장 아님?

    • @mainisnumber
      @mainisnumber 9 개월 전

      @@user-xy8km4zd1e 팩트도 있기야 하지, 합리적 주장은 영화 내용이 진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내용에 대한 주장이고, 역사에 대한 주장은 아니지

  • @user-gf8hl7ri9u
    @user-gf8hl7ri9u 년 전 +2

    14:12 폭팔x 폭발이 맞습니다

  • @user-du2fu4gt7m
    @user-du2fu4gt7m 년 전 +54

    영화는 영화일뿐 이말을 생각하고 보시면 재밌습니다. 특히 전투씬이 시원시원해서 좋더라구요. 고증도 적당히 하는게 영화의 흐름이 도움됩니다. 철저히 고증을 지켜버리면 그건 영화가 아니라 다큐가 되어버려요...

    • @user-lv5zf8lk7g
      @user-lv5zf8lk7g 년 전 +2

      .. 나랏.. 말싸미?
      그 쓰레기 영화처럼요?

    • @jinchan0110
      @jinchan0110 년 전 +4

      @@user-lv5zf8lk7g 그건 걍 거짓말투성이...

    • @WeeklyMuskNews
      @WeeklyMuskNews 년 전 +1

      @@jinchan0110 이것도 거짓말 투성이 ㅇㅇ

    • @jinchan0110
      @jinchan0110 년 전 +3

      @@WeeklyMuskNews 이겼다는 사실과, 학익진을 사용했다는 역사적 사실.
      이순신이 과묵했고 매우 신중하여 휘하 장수들이 발포를 독촉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여 고증했습니다.
      그리고 한산도 대첩이 조선측 대승이라는 것 외에는 역사적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그냥 학익진과 거북선, 대승이라는 세 키워드를 가지고 이렇게 이겼을 것 같다. 하고 상상한 영화를 만든거죠

    • @user-du2fu4gt7m
      @user-du2fu4gt7m 년 전 +6

      @@don._Quijote1605 고증을 파괴할 정도는 아닙니다. 고증을 완전 디테일하게 갑옷의 장식품 하나하나 따지는 수준이 아니라면 고증은 잘 지켰어요. 다만 영화적 연출중에 실제론 저정도는 아니겠지 수준이라는 거죠. 그리고 한산 해전의 실제 기록에서도 유인책을 써서 끌어들인 다음 섬멸했다고만 나오지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이 없어요.

  • @user-mq6dv3uu9r
    @user-mq6dv3uu9r 년 전 +6

    폭발하지 않는 포탄인 건 맞는데 실제로는 폭발한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기는 합니다. 흙에 포탄이 박히면 흙이 포탄의 운동에너지를 받아서 피부를 확 쓸어가는 식으로... 영화에서의 폭발력은 과장된 부분이 있겠으나 선은 지킨 것 같습니다.

    • @user-un4hd7xs7f
      @user-un4hd7xs7f 년 전 +7

      저도 기존의 작열탄같은 연출이 아닌 일반적인 라운드탄으로 연출한걸로 봤습니다. 해전에서 라운드탄도 명중하면 전투원들 입장에선 상당히 위험한 것은 사실이죠. 목선의 구조물이 라운드탄에 의해 관통되며 햇빛에 바짝 마른 나무조각들이 곳곳으로 비산되어 몸으로 날라오면 끔찍하죠. 더해서 발포시에 달궈진 라운드탄들이 화약고로 날아들어 유폭되는 경우는 세계사 기록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이니까요 ㅎㅎ
      실제론 영화에서 묘사한것처럼 근거리에서 조란환같은 산탄의 형태로 일본군 세키부네 갑판 위의 전투요원을 쓸어버리거나 라운드탄으로 선체를 직접 때려서 구조물의 내구성에 영향을 준다거나 하는 식의 피해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론 : 전투씬은 충파라든지 속도감 같은 부분에서의 연출은 과장된 측면이 있겠으나 영화적 허용으로 충분히 가능하며 특히 작열탄같은 묘사보단 라운드탄으로 배를 쪼개는 듯한 묘사를 한 것은 오히려 고증을 지킨 편이라고 봐야 맞지않나 싶습니다 ㅎㅎ 재밌게 봤습니다

  • @user-wy8kt3pn4b
    @user-wy8kt3pn4b 년 전 +1

    6:06
    안골포가 한산보다 빠른것으로 착각할수 있네요
    한산 대첩 양력 8월 14일 (음력 7월 8일)
    안골포 해전 양력 8월 16일 (음력 7월 10일)입니다
    양력 음력 통일을 안해주고 따로 기재해서 혼란

  • @user-hn6my7ez4z
    @user-hn6my7ez4z 년 전 +22

    9:22 당시 안골포에 있었던 두 장수의 이름이 잘못되었어요.
    고니시 유키나가 와 가토 기요마사 가 아니라,
    구키 요시타카 랑 가토 요시아키 가 맞습니다.

  • @Nompangy
    @Nompangy 년 전 +3

    편집이 너무 아쉽네요 "거나라", "가토 기요마사 초상화" 등등 확인 필요하겠습니다~

  • @inholee6926
    @inholee6926 년 전

    엠장기획의 승리닷~!!!

  • @user-yd6eo7ok2n
    @user-yd6eo7ok2n 년 전 +9

    실제랑 다르게 와키자카가 굉장히 유능하게 나와서 개인적으로 몰입이 된거 같았음 실제 역사처럼 그냥 속아서 넘어갔다면 별로였을듯

  • @AH-jc6dd
    @AH-jc6dd 년 전 +2

    영화는. 극화시킨거니까 상상이 들어갈수밖에
    그래도 국뽕오지게 드링킹하며 볼랍니다~

  • @user-lf1me1ps1m
    @user-lf1me1ps1m 년 전 +50

    영화는 영화대로 즐기고 역사는 역사대로 배워야하는 이유

    • @hiroono1
      @hiroono1 년 전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 영화를 가상의 엔터테인먼트 영화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이순신을 진짜 영웅이라고 믿고 있다. 바보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검증하는 발상이 없다.

    • @hiroono1
      @hiroono1 년 전 +1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 @user-kd4uy1px8m
      @user-kd4uy1px8m 년 전

      @@hiroono1 역사왜곡은 일본인들 전공이 아닌가. 니들은 역사를 아예 배우지도 않지 않나. 2차대전 침략에 대한 사과도 전혀없고...

    • @hiroono1
      @hiroono1 년 전

      @@user-kd4uy1px8m 조선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史記'이지만 그 때부터 이미 '燕'에 지배되고 있었다. 이후 수천년간 한반도는 중국의 속국이었다. 중국 연호를 사용하여 정기적으로 미녀를 선발하고 성노예로 중국에 헌상했다. 「공녀」라고 부른다. 때로는 중국 사신이 선택한 '공녀'는 모두 추악하다고 불평을 했기 때문에 재선발도 있었다. 조선은 일청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처음으로 독립했다. 서울독립문을 기념해 일본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식민지 압력이 높아지면서 조선은 일본에 보호를 요청했다. 그것은 1910년 한일 병합이다. 일본은 조선의 노예를 해방하고, 철도와 학교를 만들고, 음식을 충분히 유통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일 자고 먹고 섹스를 했다. 그 결과 한반도 인구는 35년 동안 두배로 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일본 인구는 300만 명 줄었지만 조선 인구는 계속 늘었다. 일본인이 싸우고 있는 동안 조선인은 섹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에서도 위안부를 모집했다. 현재 가치로 1월 3000만원의 고급이었기 때문에 모집에 따른 위안부는 많았지만 조선인 브로커도 이에 주목해 시골 소녀를 속였다. 일본 경찰은 악덕 브로커를 체포하고 많은 소녀를 구출했다. 그러나 불행한 경험을 한 소녀도 있었다. 이 위안부 문제의 원인이다.
      한국은 4.3사건으로 제주도 주민 6만명 학살하는 등 공산세력을 무차별로 탄압했다. 그러자 북한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공격해갔다. 한국 부산까지 패주했지만 김석원 장군 등 일본군 조선인 병사의 참여와 일본 무기 공급으로 역전했다. 이때 한국은 자국의 소녀를 강제연행해 아군과 미군의 성노예로 만들었다. 한국인은 오해하고 있지만 위안부의 비극 대부분은 이때 생겼다.
      일본은 한국의 국가예산의 2년분을 넘는 5억 달러를 지불하는 한일조약을 맺어 합병시대의 청산을 마치고 국민의 개인배상은 한국이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국과 합의했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빈곤 때문에 일본은 1997년까지 무상자금과 기술공여만 1조원이 넘는 원조를 실시했다. 또한 2009년에는 700억 달러의 통화 스왑에 응하고 있다.
      이런 경위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의 은혜를 잊어 청산이 끝난 징용공과 위안부 문제를 재제시하고 있다. 한국 부끄러움이지만, 한국의 많은 사람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모른다.

    • @user-kd4uy1px8m
      @user-kd4uy1px8m 년 전 +7

      @@hiroono1 그만하셔...

  • @dudrak7575
    @dudrak7575 8 개월 전

    거북선은 판옥선단의 함포 사격에서
    현저히 떨어지는 명중률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배판으로 방탄을 하고, 쇠못을 박아 등선을 차단한 뒤,
    적 함대를 뚫고 곧바로 대장선(직충이라 표현함)으로 돌격하여,
    최근거리를 확보, 최적의 명중률을 확보하여 적 대장선을 총통으로 당파하는 용도임.
    장계에 이르기를..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의 층각선(안택선류로 주로 지휘선) 아래로 곧바로 치고 들어가(직충이라 씀) 앙방포(위로 우르러 치쏘아)하여 층각을 부수자(당파라 함) 판옥선단에서 각종 포를 교발하여 적선을..."
    적 대장선에 최근접으로 접근하여 확실히 확보된 명중률로 지휘선을 타격하여 지휘체계 마비를 초래하기 위한 목전으로 개발된 특수 전투선이 거북선!

  • @mgnoble15
    @mgnoble15 년 전 +2

    7:46 제 생각인데 자기가 속해있던 막부가 멸문당하자 그 원수를 갚겠다는 심정으로 항왜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 @user-vw9cc5le5g
    @user-vw9cc5le5g 년 전 +1

    거나라,,,, 자막 보고 내가 잘못 본건가 싶었네요..

  • @user-hy1up2bc2l
    @user-hy1up2bc2l 년 전 +12

    아니 뭔 방구석 찐따 역사학자들이 많아 막상 저분이랑 역사로 이야기 하면 말 한마디도 못할거면서

  • @user-qs7pq1zt3k
    @user-qs7pq1zt3k 년 전 +4

    일단 준사는 안골포해전에서 이순신수하로들어가고
    와키자카 유인술에 바로 덥석물고 나갑니다
    영화에선 버티다가 나가는데 와키자카는 덥석물고 한산앞바다로 나갔다가 대패했죠

  • @Aamou_
    @Aamou_ 년 전

    1:37 가토 사진이 2개네요

  • @user-sn1kz4sc2h
    @user-sn1kz4sc2h 년 전 +1

    1:17 거나라요? 요나라 아닌가요

  • @lush_hong_kim
    @lush_hong_kim 년 전 +5

    영화는 영화다.
    창작보다 평가가 쉬움.

  • @user-zb7fg9lp3b
    @user-zb7fg9lp3b 년 전 +4

    원래 강한 수군을 가지고도 싸우지도 않고 배부터 다 날려먹은 원균은 대체...

  • @user-xy1nx8gy2f
    @user-xy1nx8gy2f 년 전 +1

    보는 내내 쏘는것에 진심인 민족이라던 말이 생각나네요.

  • @chuny1305
    @chuny1305 년 전 +2

    내가 본 최고의 사극영화는 남한산성이다.. 이것 만큼 밀도 높고 반성을 하게만든 영화는 없음..

  • @user-wh1is3vw2j
    @user-wh1is3vw2j 년 전 +2

    조선수군의 주 전략이 활과 포였다니까 생각난건데
    거북선은 탱커같은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거북선이 상대진영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사방으로 포를 쏴되면 왜군입장에선 이걸 무시할 수 도 없는데
    조선수군 입장에선 어처피 거북선은 뚜껑이 덮혀있으니 그냥 거북선을 무시하고 쏘면 거북선도 타격은 입을지언정 경미한 피해였을거고
    적군 측에 손해가 더 컸을테니.

    • @hiroono1
      @hiroono1 년 전

      이순신이 23전 23승이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한산도 전투까지의 3회 정도이며, 그 후의 20전은 모두 지고 있다. 덧붙여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웠다는 당시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순신에 관한 일화는 대부분 거짓말이다. 와키자카는 미역을 먹지 않았고,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적도 없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백의병에 빠진 이유는 패전이 이어져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일본군에 대해 13척으로 싸운 나루보 해전에서는 일본의 크루시마를 죽였지만, 그 후 조류가 바뀌자 200km도 북쪽으로 패주했다. 한국인은 그 싸움도, 조선군의 2번째의 전멸이 된 순천해전도, 이순신이 죽은 노량 해전도 이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리석다.

  • @dudrak7575
    @dudrak7575 8 개월 전

    안골포에서는 유인책이 먹히지 않자
    변형된 장사진으로 격파!

  • @kyunsp7285
    @kyunsp7285 년 전 +7

    자랑스러운 역사이긴 하나 우리의 부끄러웠던 부분들도 적나라하게 보여줬으면 하는 작은 바램 .....ㅠㅠ

    • @user-tw8jj3ok4f
      @user-tw8jj3ok4f 년 전 +1

      이것이 진짜 교육입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끄러워서 과거를 보지 못하면 비참한 역사는 되풀이 됩니다.
      잘한것은 자랑하고, 못하고,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도 교육시켜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 @user-hy1up2bc2l
      @user-hy1up2bc2l 년 전 +2

      솔직히 위안부는 아는데 우리가 똑같은 짓을 했다는것은 모르는게 현실

    • @forbetterworld_
      @forbetterworld_ 년 전 +2

      @@user-hy1up2bc2l 어디서요?

    • @---zg7ez
      @---zg7ez 년 전

      @@user-hy1up2bc2l 그런식으로 '누구는....뭐했는데....그러니깐 할말없다' 라고 물고 늘어지면 북한한테도 뭐라 못함 우리도 이북지역에서 저지른 전쟁범죄가 있거든 그래서 지금도 김돼지 일가는 그거가지고 남쪽 괴뢰군 운운하는거고

    • @12413412341
      @12413412341 년 전 +2

      @@user-hy1up2bc2l 도대체 어디서?ㅋㅋㅋㅋ 링크좀

  • @averline6606
    @averline6606 년 전 +1

    준사가 명량에서 두건을 쓰는걸 보면 웅치 전투 후에 갈굼을 좀 당했나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 @dudrak7575
    @dudrak7575 8 개월 전

    항왜가 쓰인 실례가 있지요.
    김충선이 된 사야가는 조총부대를 만드는데 일조,
    명량 대첩 당시 준사는 죽어 물에 떠다니는 구루지마(마다시 라 칭했음.)를 발견하고 알림.
    그외 각종 노역에 동원됨!

  • @user-rj7sy9li5w
    @user-rj7sy9li5w 년 전 +45

    첫날 조조로 가서 봤는데..역사스페셜로 생각하고 보시면 당연히 실망 하는데, 그냥 상업 영화다 생각하고 가서 봐서 볼만 했어요ㅎ 전투가 좀 더 길게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 @hiroono1
      @hiroono1 년 전 +2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 영화를 가상의 엔터테인먼트 영화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이순신을 진짜 영웅이라고 믿고 있다. 바보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검증하는 발상이 없다.

    • @user-rx4ng7gi1y
      @user-rx4ng7gi1y 년 전 +1

      @@hiroono1 미야모토 무사시의
      기록은 진짜인가?

    • @hiroono1
      @hiroono1 년 전

      @@user-rx4ng7gi1y 미야모토 무사시의 실적에 대해서는, 소설로서의 엔터테인먼트와 사실은 나누어 검증되고 있다. 일본인은 한국인처럼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다.

    • @user-rx4ng7gi1y
      @user-rx4ng7gi1y 년 전 +1

      @@hiroono1 근거와 자료는?

    • @user-rx4ng7gi1y
      @user-rx4ng7gi1y 년 전 +1

      @@hiroono1 또한 내가 알기로는
      명과 일본의 전쟁 협상도중 진주성을 공격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오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로 따지면 이순신을 비겁하다 하는건
      좀 모순적인것 아닌가?

  • @TV-ws6wt
    @TV-ws6wt 년 전

    6:06 한산도대첩은 양력으로 안골포 해전은 음력으로 날짜를 기재하여 안골포 해전이 더 먼저 일어났다고 오해할 수 있겠네요 정정 부탁드립니다.

  • @user-yy2mo1bx8i
    @user-yy2mo1bx8i 년 전 +6

    바닷바람 많이 맞아서 얼굴이 삭는다는 말은 해군 출신이 하는 말 맞습니다.

  • @ebcjun2754
    @ebcjun2754 년 전 +2

    진짜 타임머신이 있다면...한산대첩진짜 보고싶다!!명량대첩이랑...어찌 그많은 배를 다 처부셨을지???

  • @sksskdi
    @sksskdi 년 전 +2

    사람 인생 정말 어떻게 풀릴지 1도 알 수 없음

  • @user-hd4yv6yq5q
    @user-hd4yv6yq5q 년 전 +1

    대비를 했는데도 그모양인게 더 레전드네 ㅎㅎ

  • @starry709
    @starry709 년 전

    14:12 자막에 폭팔이라고 쓴거 실화냐....

  • @user-mz4qs1nb7g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근데 의자를 왜 저런걸 골라서 앉으셨을까ㅋㅋ
    왠지 주리를 틀어야 할거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디자인ㅋㅋ

  • @default8420
    @default8420 년 전 +6

    그러니까 거북선 풀버스트 장면(10:21)이 그나마 제일 고증인거죠?

  • @user-rw2mp4wg9f
    @user-rw2mp4wg9f 년 전 +3

    근데 그렇게 이순신이 쉽게 이겼다면.... 한산도 대첩이후로... 조선수군 2배가까이 전력이 확장압도적이였는데... 왜 원균이 이끌고 칠천량해전에서 전멸직전까지 갔겠어요... 그것은 지휘관의 역량이였고 항상 다른조건의 상황속에 지휘관의 순간순간의 전략적 전술적 선택 신적이였기 때문에 일본군도..바다에서의 교전을 피한거죠 단순히 화력에서 우수해서 조선이 이긴건 아닙니다.

  • @deangding9793
    @deangding9793 년 전

    결론은 " 영화는 영화다 "

  • @user-de2qr3wu9p
    @user-de2qr3wu9p 년 전 +1

    어우 우리나라에 역자학자분들 많으시네

  • @EZ2AC_FEIITV
    @EZ2AC_FEIITV 년 전 +1

    ㄹㅇ 해상에서 생활하면 얼굴이 태양에다가, 바다표면에 한번 더 반사되는 빛 탓에 두배로 삭아버리죠

  • @jungkyuhan9781
    @jungkyuhan9781 년 전 +1

    미국 전쟁역사학자가 조일전쟁(임진 왜란)을 평가한 말이 생각나네요. 당시 세계 최강의 육군보유한 일본과 당시 세계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조선의 전쟁.

  • @beo2wulf4
    @beo2wulf4 년 전 +31

    원균을 옹호하지 않는다면서 원균의 수군이 빠르게 '박살'이 났다고 하면서 마치 해전을 하고 진 것 처럼 얘기를 하네요.
    원균은 우리나라 수군중에 가장 많은 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모든 배를 지가 침몰시키고 그냥 도망 갔어요.
    싸우다 박살난게 아니라 싸우지도 않고 우리나라 수군 전력의 50%를 제 손으로 없애 버렸죠.

    • @user-kd4uy1px8m
      @user-kd4uy1px8m 년 전 +7

      칠천량에 총 134척을 몰고가서 12척만 남고 다 절단냈으니 거의 90프로 괴멸시켰죠. 저는 원균이 동서고금에 최악의 장수라고 생각합니다!

    • @user-fl1zr9ii2h
      @user-fl1zr9ii2h 년 전

      웃긴게 초급장교시절 국경선에선 이순신의 이것저것 치밀한 전략보다 원균의 패기로 닥돌작전이 더 잘먹혔다는것. 딱 단순한 선배꼰대장교나 정치가들이 좋아할 군인상이 원균이었어요. 이순신이 백의종군 된것도 부산포상륙+ 수복은 말도안되는 일이고 그냥 봉쇄만 하면 알아서 제풀에 지치는 타이밍이 온다고 말해도 감히 왕명에 거역을!?!?! 이딴 성리학꼰 마인드로 해전에 무지한것들이 지휘관을 바꿔버리니 이런 분위기에 이순신처럼 이것저것 치밀했다간 모가지니깐 자기목보다 부하들 목을 포기한거죠.
      이런 분위기는 얼마전까지도 다르지않았죠 그저 닥치고 반일, 우리는 어떻게든 이긴다ㅋㅋㅋㅋ 어떻게 이기지? 그런거 없이 오로지 싸우자 이기자 이딴 마인드로 운용되는 국가고 군대고 그 어떤국가한테도 이길수없음

    • @user-kd4uy1px8m
      @user-kd4uy1px8m 년 전 +9

      @@user-fl1zr9ii2h 그나저나 앞으로 4년 9개월이 걱정입니다...무사히 지나갈까요...

    • @user-fl1zr9ii2h
      @user-fl1zr9ii2h 년 전

      @@user-kd4uy1px8m 중국에 나라팔려던 부패한 관료냐 아님 젊은피로 겉껍질 탈바꿈하더니 선거몇번 이기곤 기고만장해져서 젊은승장 몰아낸 꼰꼰대는 무능한 할배들 당이냐 그 차이죠 뭐 ㅋㅋㅋㅋ사실 박그네 이후로 한국은 이미 이상해졌었어요 ㅋㅋㅋㅋㅋ 문재인때는 더 광기 그 자체인 시대였고. 더 중요한건 중국이 포섭한 여야내 관료들이 아직도 힘이 열라게 세다는것. 지금 대통령이 뭐하나 하려해도 할수있는거 별로 없어요ㅋㅋㅋ 일반 국민이 알아야할건 지금 진짜 적이 누군지나 잘파악해야해요. 왜냐면 높으신 틀딱들은 모르거든요 ㅋㅋㅋㅋㅋ

    • @Juanseo70
      @Juanseo70 년 전

      @@user-kd4uy1px8m 문재인 정권도 견뎌냈습니다. 너무 걱정마세요. 지금 민주당 대깨명 일각에서는 윤석렬 몰아낸다고 박근혜 탄핵을 무효화하려는.시도가 진행중이니 우선 그 문제부터 예의주시하시기 바랍니다.

  • @user-zq7jx8zy2q

    실제는 충파가 아닌 당파였다고 하더라고요

  • @Warthog0927
    @Warthog0927 년 전 +1

    생각해보면 이거 임진왜란에서도 현대전을 볼수있는게 실전이 없으면 지금도 저런일이 날수도있다는거

  • @HyundaiKIA_Sudden_Acceleration

    찌부 ㅋㅋㅋㅋㅋㅋ오랜만에 듣네요 ㅋ

  • @user-ry7oy8vq8r

    재원쌤은 못참지 ㅋㅋ

  • @user-zm9hy4rk3f

    1:36 저 그림 둘 다 가토 기요마사임

  • @user-jk4dt7hw1l
    @user-jk4dt7hw1l 년 전 +7

    화살난사하는 장면이 많이나왔어도 짜릿했셌네여.

    • @hiroono1
      @hiroono1 년 전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를 가상의 괴수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거북선을 타는 이순신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오인하고 있다. 한국인 이외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한국의 조직적인 역사 날조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 @user-jk4dt7hw1l
      @user-jk4dt7hw1l 년 전

      @@hiroono1 제가 많이 배우질 못해서 크게 공감해드리진 못하겠만 모든나라에 대부분의 국민들이 본인 국가에 맞게 역사를 재해석하며 문화로 즐기며 살아가고있다구 생각합니당.

    • @hiroono1
      @hiroono1 년 전

      @@user-jk4dt7hw1l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 @user-jk4dt7hw1l
      @user-jk4dt7hw1l 년 전 +1

      @@Ju-ei6zf 아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당

  • @user-wn1ph1bu3f

    거북선은 선봉대로 적진에 들어가서 전열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대장선으로 돌진 용머리의 작은 포로 적장을 죽이는 용도로 썼을것 같다.

  • @user-nn2md2qx1p

    새로운 정보 하나 알고 갑니다.. 이순신장군 해군이였기에.. 바닷바람으로 인해 노안이였다

  • @flowofthinking
    @flowofthinking 년 전 +14

    그래도 학익진을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짜릿했습니다. 어설픈 멜로나 눈물씬도 없고

    • @hiroono1
      @hiroono1 년 전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를 가상의 괴수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거북선을 타는 이순신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오인하고 있다. 한국인 이외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한국의 조직적인 역사 날조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 @user-nf5ri8ht6b
    @user-nf5ri8ht6b 년 전 +9

    우리가 서양 보다 아쉬운게 무기나 그런 게 안남아있고. 전술도 안남아 있다는 게 아쉽습니다. 거북선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매복해서 이겼다는데. 어떻게 매복하고. 어떻게 공격해 이겼는지. 자세히 안남겼다는 게 참 아쉽습니다.

    • @user-fc7st1up6z
      @user-fc7st1up6z 년 전

      매복은 말그대로 매복.... 지금처럼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없기에 앞으로 나가서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는 옛날이기에 섬뒤쪽이나 협로를 빠져나오는 좌우측에 대기하고 있었던것. 그리고 영화처럼 배들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을겁니다. 노젓는 그 큰배들이 그렇게 빠를수가 없죠. 그리고 배와 배간 통신수단이 있는것도 아니고 ..... 매복이란 그냥 말그대로 매복... 일뿐입니다. 옛날이니 가능한일들. 난중일기에 또는 장계에 내용은 많습니다. 어떻게 매복하고 포위하고 공객했는지....

    • @cz_line9051
      @cz_line9051 년 전 +4

      서양이 전쟁 기록이 엄청나게 발전한게 전쟁할때 귀족들이 높은곳에서 구경하고 화가가 그리고 작가가 시계단위로 글을쓰던 문화가 있었죠
      동양적 측면에서 보면 전쟁하는데 저게 뭔짓이냐 싶은 문화

    • @jamesmillerjo
      @jamesmillerjo 년 전 +1

      @@user-fc7st1up6z 서구권에서 기록한 전투흐름과 전황에 대한 기록과
      우리나라 및 동양권에서 보고서와 사서에 기록한 방식의 디테일은 많이 다른게 사실입니다

    • @inx2853
      @inx2853 년 전

      무기는 남아있습니다
      활이나 총통, 포탄도 있고 장전법또한 알고있습니다
      그냥 관심이 부족한거죠

  • @seongmin663
    @seongmin663 년 전 +1

    예비대 합하면 28만명입니다.
    정규군 17만+예비병력 11만인데
    대체 어디서 총합 20만이란 자료를 가져오셨는지
    심히 의심되는군요

  • @user-bg4tb8xq5e

    말한마디에 동족을 향해 남침한 북한... 그는 도대체.... ㅋㅋㅋㅋ

  • @user-wq2nm3wi8n

    불멸의 이순신보면 활 쏘는 장면 많이 나옵니다

  • @WorldWithoutApples

    이순신 장군 영화들은 역사적으로 만들면 재미가 없겠죠. 장군께서 항상 엄청나게 압도적인 승리를 이끄셨으니까.

  • @alcarguitar
    @alcarguitar 년 전

    1:18 거나라는 뭐여...

  • @user-wn4oj9zz4e
    @user-wn4oj9zz4e 년 전 +1

    시간은 흘러 이천년이 넘었다 우리 후세는
    역사를 직시해야한다 생걱한다 임진왜란이 발빌하여 그따 그분들이 없었더라면 이나라 대한민국이 과연 존재 했을까! 역사를 가르치는 분이지만 시간이 흘렀다 하여 웃음이 나오는가! 그때 그분들은 죽기살기로 싸웠을겄이다
    왜냐고? 부모 형제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는 이리 말하고싶다
    생각이 멈추면 산 송장이다 라고...

  • @charleseppes4061
    @charleseppes4061 년 전 +4

    역발놈 김재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역사 뇌피셜 그놈" 잘 보고 있습니다♥♥♥

  • @TheMirhunter
    @TheMirhunter 년 전 +6

    저 시대에 당연히 폭발탄이 아니죠. 다만 목선에 대포를 쏘면 나무 파편들이 튀면서 폭발탄 비슷한 효과는 냅니다. 그리고 한산에서 제일 아쉬운게 조선 수군의 최대 병기 대장군전이 안나왔다는거…김한민 감독은 명량때부터 거북선에 엄청나게 집착함.

    • @1q2w3e4r3
      @1q2w3e4r3 년 전

      포탄에 쇠구슬 대신 비격진천뢰를 넣고 쏘면 폭발탄 아닌가요? 아직 비격진천뢰 없던 시절인가

    • @TheMirhunter
      @TheMirhunter 년 전 +1

      @@1q2w3e4r3 비격진천뢰는 발사하는 포도 다를뿐더러 왜군 배 위에 정확히 안착시켜야 하는데 그게 가능했을리가 없죠.

    • @user-vu8fr6hn4s
      @user-vu8fr6hn4s 년 전

      비격진천뢰는 완구라고 하는 총통으로 쏩니다 명량에서 한번 나왔는데

    • @user-vu8fr6hn4s
      @user-vu8fr6hn4s 년 전

      @@TheMirhunter 던졌을 가능성이 있죠

    • @prohightension2000
      @prohightension2000 년 전 +1

      @@user-vu8fr6hn4s 비격진천뢰는 아마 육군에서만 쓰였을 거에요 해전에선 안쓰인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던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던질 수 있는 거리에서 던지면 아군도 피해를 보지 않을까요 ㅋ

  • @user-hw6jc6xg2f

    거북선 충파는 전문가라도 사람들마다 말이 다 다르네요~ 최태성님은 안에 수용된 90명의 노꾼이 저어서 10~20km 속력으로 앞만보며 직진해서 적의 배를 부수는 돌격선이라 했는데 김재원님은 아닐확률이 크다고 하고...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그런가...?

    • @-Y-B-
      @-Y-B- 년 전

      당시 전함은 전부 노를 동력으로 하니 거북선이 전속력으로 접근해서 왜선에 먼저 부딪혀 충격을 주면 두배가 바싹 붙을거고 왜선이 급히 도망가지도 못한 상태에서 화포를 동시에 발사하면 왜선은 한순간에 누더기가 되었을겁니다. 왜군은 거북선이 다가오면 공포에 사로잡혔겠죠

    • @---zg7ez
      @---zg7ez 년 전

      답이 없다보니 이건 영화마다 알아서 창작하는게 정답임

    • @twinkle1109
      @twinkle1109 년 전

      어떻게 시속 10~20키로로 밖아서 배를 부숩니까 그리고 그러고나면 속도가 0일텐데 지금도 50톤 차리 배 가속 하려면 한참은 걸릴텐데 노군으로 순식간에 가속함.. 생각해보면 당연히 안되겠다가 상식적으로 나옴..

  • @ctngel1990
    @ctngel1990 년 전

    준사가 이순신 장군편으로 돌아선 이유는 그게 아니라 자기 주군은 자신과 수하들 방패삼아서 도망간 반면 이순신장군은 자기 수하 살리랴고 직접 목숨을 걸던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라는 설정 아니었나요?

  • @user-uz5ex8si4b

    가장 정확한 팩트는 국립진주박물관 유튜브를 보시는게 가장 정확하실듯합니다 정말 밥먹고 조선수군과 조선군의 전술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 말이 가장 정확하죠 활이 주력이고 원거리 공격 가설이 좀 많이 오래된 가설이라 역사학자시긴하지만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물론 역사학자가 모든 시대를 연구하는건 아닐테니 이해는 합니다만 비전공자에겐 정설로 읽힐듯하여 우려가 되네요

  • @jongheunglee
    @jongheunglee 년 전

    저도 해군 출신이지만 바닷물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스테인리스 스틸도 일부분 녹슬게 만들죠
    그러니 사람 피부는 말할것도 없이 얼굴이 삭아요 ..바다에 놀러 갔다와서는 세차도 하시고..잘 씻으시길 ㅋ

  • @user-mg8mt7dh1m

    영화 한산,명량 일본에니메이션 보는줄 알앗음

  • @FiveSolas1
    @FiveSolas1 년 전 +4

    이분은 '대가리', '아가리' 라고 제대로 얘기 하는데 왜 자막을 '머리', '입'으로 바꿔서 마치 얘기 하는 사람이 잘못 얘기한 것처럼 표기하나요? 사람 이외의 동물이나 사물의 신체 부분은 아가리와 대가리로 지칭 하는 것이 어법상 올바른 표현입니다. 소위 '방송국 놈'들이 지들 멋대로 사람에게만 써야 될 '머리'나 '입'같은 단어를 동물한테도 쓰는거죠.

  • @stellina4557
    @stellina4557 년 전

    거의 국가의 경제력이랑 인력을 전부 다 동원을 했을정도의 총력전이여서
    후폭풍이 매우 거셌져.
    일본은 또 다시 내분이 일어나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해서 에도 시대가 열렸고 명나라 역시 연해주랑 만주 등지의 여진족을 제어하지 못해서 후금, 청나라로 넘어가면서 멸망했으며, 조선 역시 여진족을 제어를 못했고 청나라가 나오고, 정묘호란이랑, 병자호란을 겪었져.

  • @-Y-B-
    @-Y-B- 년 전 +2

    수군의 주무기가 활이라고요? 진주박물관측 분석으로는 거리에 따라 화포. 총통. 활.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과 일종의 저격총통까지 다양한 무기를 적절히 사용했다합니다. 활은 근접전에서 사용했다해요. 너무 쉽게 단정마세요. 거북선도 어슬렁 거리며 위협만 했다니요. 적진 사이 비집고 들어가 화포를 쏘면 적군입장에선 공포가 극한이었을겁니다.

    • @-Y-B-
      @-Y-B- 년 전

      @북한강 살쾡이 주력의 뜻을 모르겠냐? 비판을 하려면 내용을 제대로 풀어라. 말 장난으로 빈정대지 말고. 해상전에서 거리에 따라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데 최근거리 무기 활을 주력이라하면 되냐? 그리고 주력의 뜻을 아니까 그게 아님을 말한거 몰라? 가서 진주박물관 영상 한번이나 보고 와. 모르면서 빈정거리지말고!

    • @-Y-B-
      @-Y-B- 년 전

      @북한강 살쾡이 너 같이 존대하는게 빈정거리는 투라면 그게 존대겠니? 너 수준에 맞춰 한거니 슬퍼말거라.

    • @gaemin13
      @gaemin13 년 전

      국뽕충 한명 추가

  • @user-pz5ox7jb7w

    재원쌤 여기서도 보네요.

  • @0900hoon
    @0900hoon 년 전 +5

    기록의 조선이라 불리는데 거북선 자료가없다 궁금하네요

    • @user-rj7sy9li5w
      @user-rj7sy9li5w 년 전 +3

      왕에 대한 기록은 많은데, 전투기록이라던가 그런건 자세히 나온게 없다고 들었어요..서양은 병력 배치 하나, 적의 움직임 하나 등 세세하게 기록된 사료가 많은데 반해서요

    • @joseph_kim
      @joseph_kim 년 전

      모르죠.. 일제강점기때 어째 했을지두....ㅜ

    • @user-ps8ir7jc8x
      @user-ps8ir7jc8x 년 전 +1

      왕이 똥 싼 기록은 남겨도 거북선 기록은 안 남긴 조선 ㅋ

    • @leesy3502
      @leesy3502 년 전 +1

      난중일기만봐도 어디서 언제 전투했다.이겼다. 이런식이라 ㅋㅋㅋㅋㅋㅋ 역사 작가가 고증하려 쓰려해도 자료가 없었다고

  • @foddlanakf7640
    @foddlanakf7640 년 전 +8

    항왜 준사가 말 한마디에 넘어간건 이미 싸우기 싫고 전국시대 막 끝났는데 또 보내는 일본군에 대한 환멸, 조선을 먹더라도 또 명나라가서 싸우게되겠지 하는 등 이미 심리적으론 일본군에 계속 있으면 안되겠다...라고 생각한거 아닐까요
    의라는건 사실 조선군으로 가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것같음

    • @Hanx0121-fm6ls
      @Hanx0121-fm6ls 년 전 +4

      그럴수 있죠 ㅋㅋㅋ 당시 일본의 경우 전국시대 겪으면서 같은 민족 같은 나라라는 개념이 굉장히 희박했다는 걸로 알고 있어요. 게다가 전국시대 때 서로 오지게 싸우던 원수 사이에서 같은 편으로 싸우는 입장이 됐는데 같은 막사에서 자다가도 아 ㅅㅂ 저 새퀴가 배신만 안 했어도 또는 저 새퀴가 내 전우를 !!!!! 하면서 부들부들 떨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일본에서는 원채 잘싸우는 놈들이 많아서 입신양명하기 힘들거 같았는데....조선 오니까 병사라는 놈들 10명이 나 하나한테 다 쳐발리는거임!! 이거 칼 거꾸로 쥐면 나도 여기서 출세할 수 있는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깔려있지 않았을까요!!?

    • @user-zq7jx8zy2q
      @user-zq7jx8zy2q 년 전

      준사는 병자호란때도 열일 하셨다해서 깜놀.

    • @jschoi8611
      @jschoi8611 년 전

      저도 그렇게 생각함. 뭐 항복하면 새로운 주군에게 충성을 바쳐야하는 그네들 사상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조선 특유의 성리학의 문치주의가 그네들에게 신선하게 보일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무라이 정신과는 달리 조선의 성리학이 일본과는 다르게 충과효를 강조해서 그네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올수도 있다고 봐요. 일본 사람일지라도 일본 무사도 정신이 안맞고 조선의 사상이 맞을수도 있겠죠

  • @user-ri4hf8nw9z
    @user-ri4hf8nw9z 년 전 +1

    원균이 무능한 장군인건 맞아요 가 킬포

  • @K2BlackPanther
    @K2BlackPanther 년 전 +12

    활이 주력이기도 했었지만 승자총통과 소승자총통이라는 소형화기도 주력이었습니다 명량도 그렇고 한산도 나오지 않아 아쉽네요
    자세한건 진주박물관 채널에 나와 있습니다

    • @user-vu8fr6hn4s
      @user-vu8fr6hn4s 년 전

      화약 낭비 아까워서 100보안에서 조란탄 쏘고 근접전? 점투로 갔다던데 임진왜란 1952보시면 제말이 뭔지 알거예여

  • @game-ip6hz
    @game-ip6hz 년 전

    14:50 원래 해군은

  • @eastemar
    @eastemar 년 전 +1

    이유없는 국뽕 싫어해서 국뽕채널 다 차단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산은 국뽕이라해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크흐... 명량 이상의 영화가 나올 수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크흐.....

  • @hothdog4888
    @hothdog4888 년 전 +3

    밀리터리 덕후, 역사 덕후 여러분 고증 거리면서 왜 2차대전 영화 봐요? 전혀 고증 안되있던데 ㅋ